어느푸른저녁

나중에 하는 이야기

시월의숲 2015. 12. 12. 16:54

토요일이었다.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핸드폰을 들여다보니 오전 11시 58분. 거의 12시였다. J는 짜증스러운 기분을 느끼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동생의 말은 저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 같다가도,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잠에서 현실로 돌아오는데에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J는 정신을 가다듬고 동생의 말을 들었다. 동생은 다짜고짜 아버지에게 전화를 해보라고 다그쳤다. J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고, 동생은, 자신이 오늘 아버지한테 가보려고 했는데 오지 말라는 대답을 들었으며,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이유를 말해주지 않는다고 걱정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동생은 자신이 아무리 아버지에게 물어봐도 대답하지 않는다고 속상해하며, J더러 전화를 해보라고 했다. J는 자신의 유일한 행복인 토요일 오전의 단잠이 방해받는 것에 대해 화가 나면서도, 동생의 걱정스러워하는 말투에 알았다고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J는 또 왜, 무슨 일 때문에 아버지가 그러는 것인지, 궁금하다기보다는 짜증스러움이 섞인 화가 밀려옴을 느꼈다. 그리고 이내 피어오르는 갖가지 의심과 걱정 때문에 이미 잠은 저만치 달아나버렸음을 깨달았다. J는 정신을 차리고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생각보다 일찍 전화를 받은 아버지는 오히려 J에게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J는 단도직입적으로 왜 동생이 오늘 가려고 하는데 못오게 하는지,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 것인지 물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나중에 이야기하겠다고 하면서, 지금은 말할 수 없다고 했다. J는 치밀어오르는 화를 누르며, 그러면 알았다고, 정 말을 못하겠다면 그렇게 하라고 했다. 이유를 말하지 않는 것이 더 걱정이 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전화를 끊고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말을 못할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러느게 아니겠냐며, 나중에 만나면 이야기 해준다고 하니 그때까지 기다려보자고 동생을 안심시켰다. 그건 J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동생만이 아니라, J 스스로를 안심시키려는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J는 그닥 안심이 되지 않았다. J는 토요일 오전에 벌어진 작은 소동 때문에 마음이 심란해졌다. 말하지 않는데서 오는 갖가지 상상이 자신 안에 있는 익숙한 불안을 자극했다. 영문을 모르는 누군가는 말하리라. 아버지가 나중에 이야기하겠다고 말하면 그렇게 알고 있으면 되지 무슨 걱정이 그렇게 많냐고. 하지만 J는 아버지의 그 말에 담겨 있었던 수많은 과거의 일들을 생각했다. 아버지가 말한 '나중에 할 이야기'들 때문에 그동안 얼마나 많이 가슴을 졸여야 했는지 누구도 알 수 없으리라고. J는 한동안 잊고 있던, 익숙하지만 설명하기는 힘든 불안이 싹트는 것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생을 오지 못하게 한 이유를 들을 수 있는 날은 언제일까. 아버지는 언제나 나중에 말하겠다는 말을 자주했다. 한참 대화를 하다가도 중요한 사안이 나오면 항상 발을 빼듯, 무슨 중대한 사연이라도 있는듯, 늘 나중에 이야기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J는 아버지가 말하겠다고 한 나중이 언제인지 늘 궁금했다. 지금까지 하지 않은 이야기를 도대체 언제 하겠다는 말인가. 아버지가 말한 나중은 아직도 도래하지 않았고 어쩌면 영원히 도래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J는 아버지가 하는 그 말이, 자신의 곤궁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궁여지책처럼 보여서 못마땅했다. J는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그 수많은 비밀을 결코 알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설사 J와 동생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하더라도, 그것을 말하지 않으려는 아버지의 그 태도 때문에(결국 끝까지 말하지 않거나, 말하더라도 실제로는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무슨 중대한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뜸을 들이며 이야기하는 그 태도 때문에) J는 더욱 알고 싶지 않았다. 결코 신경쓰지 않으리라. 결코 걱정하지 않으리라. J는 속으로 다짐했지만, 그러한 다짐과는 별개로 피어오르는 불안한 예감 때문에 J는 결코 신경쓰지 않을수도, 걱정하지 않을수도 없었다.

'어느푸른저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어진 일만 열심히 하면 모든 것이 다 괜찮은 것일까  (0) 2015.12.17
더딘 하루  (0) 2015.12.16
부산강아지  (0) 2015.12.07
어떤 버릇  (0) 2015.11.30
어떤 산책  (0) 2015.1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