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서(書)

단순한 응시

시월의숲 2016. 2. 1. 23:29

선명한 윤곽의 사물들은 위안을 준다. 햇살이 가득 스며든 투명한 사물들은 위안을 준다. 푸른 하늘 아래를 지나가는 생명을 보고 있노라면 많은 상처를 잊을 수 있다. 나는 끝없이 잊는다. 나는 기억한 것보다 더 많이 잊는다. 내 투명한 공기의 심장은 사물의 충만함으로 가득 차고 사물의 응시가 나를 부드럽게 만족시킨다. 영혼도 육체도 없는 단순한 응시. 나는 단 한번도 그 이상이 아니었다. 오직 스쳐 지나가면서 응시하는 한 줌의 공기였을 뿐이다.(526쪽,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봄날의책,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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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그렇듯, 나는 기억한 것보다 더 많이 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더욱 '영혼도 육체도 없는 단순한 응시' 속에 살고 싶다. 응시 그 자체가 되고 싶다. 한 줌의 투명한 공기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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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무섬마을에 다녀왔다. 마을을 휘돌아나가는 몇 겹의 가느다란 강과 모래사장. 강 위에 제법 위태롭게 놓여있는 외나무다리를 보았다. 곡선으로 휘어져 있는 외나무다리보다 나는 모래사장 위에 가지가 뚝뚝 잘린 채 서 있는 나무들이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얼굴을 때리던 차가운 바람. 나는 생각지도 못한 바람의 세찬 공격에 얼떨떨한 채로 마을을 둘러보았다. 나는 그곳에서 무엇을 본 것인가. 바람이 사물들의 윤곽을 더욱 선명하고 투명하게 만들고 있었다. 선명한 투명함 혹은 투명한 선명함이라고 해야 할까. 투명해진 사물들은 그만큼 텅 빈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쓸쓸하지는 않았는데, 어떤 충만감이 나를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그 충만감은 무엇이었을까. 페소아가 말했듯, 사물들의 선명한 윤곽이 내 심장에 주는 아주 조금의 위로였을까. '오직 스쳐 지나가면서 응시하는 한 줌의 공기'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