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서(書)

우리가 얼마나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서로를 위하고 있는지

시월의숲 2016. 3. 4. 22:32

  오 타인들이여, 당신들은 한번이라도 생각해보았는가. 우리가 얼마나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서로를 위하고 있는지를? 그러면서도 우리가 얼마나 서로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우리는 서로를 보지만, 서로를 보고 있지 않다. 우리는 서로의 말을 듣지만, 각자 자신의 내면에서 울리는 어떤 목소리를 듣고 있을 뿐이다.

  타인의 말은 우리가 듣는 오해이며, 이해의 난파선이다. 그러나 우리는 타인의 말을 이해하고 있다고 얼마나 굳게 확신하는가. 타인의 말에 실어 보내는 욕망에는 죽음의 맛이 난다. 타인이 특별한 의도 없이 무심한 입술에 올리는 것에서 우리는 욕망과 삶을 읽는다.

  순수한 해설자로서 당신이 번역하는 시냇물의 목소리, 나무의 목소리, 우리가 온갖 의미를 부여하는 이파리의 술렁임, 아, 내가 모르는 내 사랑이여, 이 모두는, 우리 독방의 쇠창살 사이로 날아가버리는 이 모든 환상의 재는, 얼마나 분명히 우리 자신인가!(552쪽,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서』, 봄날의책,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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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쩌면 자신만의 언어로, 자신만의 방식으로 타인을, 타인의 말을 이해하려 하는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러할 것이다. 그것은 타인에게는 결코 보이지 않는, 오로지 자신만의 방식이기에, 우리가 타인에 대해서 안다고 느끼는 그 순간, 그것은 나 자신을 이해하게 되는 순간인 것이다. 그것은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서로를 위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타인에게 온전하게 전달되지 않고, 오로지 자신만의 감정으로 남는다. '우리는 서로를 보지만, 서로를 보고 있지 않고, 서로의 말을 듣지만, 각자 자신의 내면에서 울리는 어떤 목소리를 듣고 있을 뿐'이므로. 우리의 비극은 서로를 위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서로에 대해 모른다는 사실에서 온다.


내가 저 문장들을 몇 번씩 읽었기 때문일까. 아주 오래전에 읽은 것도 같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엊그제 읽은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그래서 블로그에 글을 올리기 전에, 예전에 내가 이 문구를 올린 적이 있는지 확인해야만 했다. 그것은 내가 늘 머릿속에 품고 있던 생각들이 글로 표현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소통의 불가능성을 말하고 있는 저 문장들을 읽을 때면, 어쩔 수 없이 쓸쓸해지지만, 나는 앞의 문장들에서 조금이나마 위안을 얻는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서 모르지만(모를 수밖에 없지만),  '우리가 얼마나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서로를 위하고 있는지' 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