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서(書)

타인들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시월의숲 2016. 1. 22. 21:44

나로서는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고 아무리 질문을 해도 해답을 발견할 수 없는 일은, 타인들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내 것이 아닌 영혼이 어떤 방식으로 있을 수 있는가, 그리고 내 것이 아닌 의식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다.

… 문학의 주인공들과 회화에서 나타난 인물은, 소위 말하는 현실의 인간들보다 나에게 더욱 가깝고 친근하며, 신뢰감을 준다. 현실의 인간들은 살과 피라고 불리는 형이상학적인 무용지물이다. 그런데 이 "살과 피"는 그들을 가장 잘 묘사해주는 말이다. 그들은 조각조각 잘라서 정육점 대리석 진열대에 내놓은 고깃덩이, 살아 있는 것처럼 피를 흘리는 죽은 생명체, 운명의 갈비이며 뒷다리살이다.(532~533쪽,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봄날의책,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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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들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그들이 쉬는 숨의 온도와 그들의 피부에 와닿는 눈의 차가움과 그들이 보는 사물들의 모습은 도대체 어떠한가. 그것은 내가 숨쉬고, 느끼며, 보는 모든 것들과 어떻게 다르고, 어떻게 같은가. 때로 그들은 아무런 감각이 없는 석상처럼 내게 다가오지만, 그러한 석상이 내게 말하고, 지시하며, 화낼 때, 또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은 무엇인가. 그들은 내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 혹은 내가 그들에게 미치는 영향이라는 것이 있기는 한 것인가. 그들은 단지 '살과 피'를 가진 '형이상학적 무용지물'일 뿐인데, 나는 어쩐지 그런 그들에게서 때로 이해할 수 없는 분노와 멸시를 느낀다. 그들의 한 마디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나를 느낀다. 나는 그들이 어떻게 존재하는지 모르고, 내 것이 아닌 영혼이 어떤 방식으로 있을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소설 속 주인공들은 다르다. 그들은 어느 누구보다 나와 가깝게 느껴진다. 그것은 그들이 내게 감정이 섞인(혹은 아무런 감정이 섞이지 않은) 말을 직접적으로 건네지 않고, 간접적인 방식으로 내게 말을 건네기 때문일 것이다. 그 말은 실제적인 어떤 음이 내 귓가에 들리는 것이 아니라, 내 내면의 귀를 통해 조용히, 하지만 확실하게 파고든다. 그래서 소설 속 주인공들은 신뢰할 수밖에 없다. 반면 현실 세계에서 끊임없이 말하고, 웃고, 울며, 움직이는 인간들은 내게 아무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차디찬 석상일 뿐이다. 페소아처럼, 그들을 '정육점 진열대의 고깃덩이', '살아 있는 것처럼 피를 흘리는 죽은 생명체'라고 말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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