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가련한 사람들

시월의숲 2016. 2. 8. 21:12

조용한 설이다. 적어도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은, 분주하지 않고, 북적이지 않고, 고요하기까지 하다. 어제도 마찬가지였다. 어제는 안동에서 버스를 타고 울산을 갔다.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를 만나고, 전을 부치고, 나물을 다듬고, 막걸리를 마셨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드라마 몇 개를 보았는데, 그것이 모두 하나의 드라마처럼 보였으며, 오래전부터 보아왔던 연기자들이 오래전부터 보아왔던 출생의 비밀을 간직한채, 서로 음모와 복수를 하기 위해 눈에 힘을 주며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모습이 마치 오래전에 이미 수천번을 보았던 것 같은, 기시감을 느끼게 했다. 그래서일까. 어제부터 오늘까지 울산에서 했던 모든 일들, 가기 전에 내키지 않았던 마음과, 가서 제사를 준비하는 일련의 과정들과 별로 변한 것이 없어 보이는 큰아버지와 큰어버니의 모습과 그 속에서 가시방석에 앉은 것 같은 불편함과 불안함이, 이미 수천번은 겪었던 것 같은, 그래서 오히려 친숙하고, 살짝 희극적이기까지 한 것이었다. 내키지 않음과 불편함, 늘 죄를 지은듯 불안했던 마음이, 이번 울산행에서는 살짝 풀어진 듯 느껴졌다. 그와 더불어 놀랍도록 한적한 대도시의 거리가 더욱 조용한 설처럼 느껴지게 했는지도 모른다. 큰어머니는 드라마를 보면서 특정 인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을 했다. 복수를 할 수 밖에 없는 인물이며, 온갖 나쁜 짓은 다 저질렀으므로, 저런 벌은 받아도 마땅하다고. 나는 큰어머니의 말을 들으면서, 인간이란 타인이 저지른 부도덕한 일들에 대해서는 비난하기를 서슴치 않으면서,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존재라는 생각을 했다. 그들은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며, 오로지 타인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만 지적하고 욕하기를 서슴치 않는다. 누군가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기라도 하면, 전혀 논리적이지 않고 모순적인 감정으로 가득찬, 이해하지 못할 말만 잔뜩 늘어놓은 채, 자신은 전혀 잘못이 없으며, 그러므로 자신은 아무런 가책을 느낄 필요도 없다고 말한다. 왜 그러한가. 왜 누군가와는 말을 하기가 힘든가. 왜 대화를 할 수 없는가. 왜 듣지 않는가. 왜 생각하지 않는가. 왜 공감하지 않는가. 왜 편견과 고정관념으로 눈이 먼 채, 눈 앞의 진실을 보려하지 않는가. 왜 타인의 진심을 들으려 하지 않는가. 이것은 특정한 누군가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나 스스로도 누군가에게는 그러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나는 완벽하지 않다. 나는 완벽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누군가를 이해하고 싶다. 진실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 싫다. 누군가로부터 상처를 받기도 싫다. 왜 우리는 서로 상처를 주지 못해 안달인 것일까? 왜 우리는 그렇게 태어날 수 밖에 없는가. 큰어머니가 드라마 속 인물을 향해 퍼붓는 말들을 들으니 괜히 그런 생각들이 두서없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온통 아픈 사람들. 몸이 아니라 마음이 온통 멍든 사람들. 하지만 자신이 아픈 줄도 모르는 사람들. 자신이 아픈 줄도 모르고, 타인에게 화를 내고, 상처를 주는, 가련한 사람들. 우리는 모두 조금씩 아프다. 우리는 모두 다 가련한 존재들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조금 위안이 되는 것 같았다. 가련한 존재인 내가, 이미 가련했던 조상들에게 절을 하면서 내 가족의 평화를 빌었다. 이런 나를 조상님들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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