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감정들

시월의숲 2016. 2. 14. 17:32



그저께부터 계속 흐리고 비가 왔다. 나는 밖에 나가지 않고, 금요일 저녁 음주로 인한 숙취를 달래는데 토요일을 보냈다. 오늘도 늦게 일어나 아침겸 점심을 샌드위치로 간단히 떼우고, 책을 읽다가 인터넷을 하다가 했다. 고요하고 평화롭지만 너무 무기력해지는 것 같아 산책을 하기로 했다. 마침 그저께부터 온 비가 그치고 햇살이 빛났으므로 산책은 당연한 일처럼 생각되었다. 하지만 밖으로 나와보니, 희끗희끗 눈발이 날리고 있었고, 바람이 제법 불어 체감온도는 떨어져 있었다. 화창한 날씨에 눈이라니. 나는 감정이 약간 이완되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강을 따라 평탄한 길을 쭉 걸어갔다 오려고 했으나, 언제부턴가 마음 속에 남아 있었던 집 근처의 산길이 떠올랐다. 발걸음은 자연스레 산쪽으로 향했고, 나는 발걸음이 이끄는데로 산길을 올랐다. 비가 와서 길바닥이 질척이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기우였다. 비가 언제 그쳤는지 모르겠지만, 그 사이 산길은 제법 말라서 비의 흔적을 거의 느낄 수 없었다. 어쩌면 산을 올라갈수록 세차게 불던 바람이 산길의 빗물을 싹 거두어간 것인지도 몰랐다. 산을 오르면 오를수록 위협적으로 부는 바람 때문에 몸이 휘청거리기까지 했지만, 나는 왠지 웃음이 났는데, 그것은 예기치 않게 맞닥드린 손님과도 같이 당황스러우면서도 반가운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야트막한 산을 조금 오르자 도시의 전경이 발 아래 훤히 펼쳐졌다. 그 광경은 내가 이 곳에 와서 처음 보는 것이었다. 정말 조금만 걸어 올라갔을 뿐인데, 이 도시의 모습을 이렇게 훤히 볼 수 있다니! 그곳에 서서 풍경을 바라보다가 다시 올라왔던 곳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일요일 오후의 산에는 나를 제외하고 한 두 명의 사람밖에 볼 수 없었다. 다들 모자를 푹 눌러쓰고, 종종걸음으로 산길을 걸어내려갔다. 나는 그들의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먼 발치에서 그들의 존재를 확인했을 때, 내 안에 알 수 없는 위안이 번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오로지 회갈색빛 산의 풍경과 몸이 휘청거릴 정도의 세찬 바람 소리 밖에 들리지 않았던 그곳에서, 나 이외의 누군가가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내게 알 수 없는 위안을 준 것이다. 나는 멀리 있는 그들에게 마음으로 인사를 하고 천천히 산을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에 산을 뚫고 나있는 철로를 보았다. 이 산은 인간들이 만든 철로가 가로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커다랗게 뚫린 철로의 구멍 속에는 모든 것을 삼켜버릴 듯한 어둠이 농밀하게 깔려 있었다. 어쩌면 그 구멍 속에서 이렇게 세찬 바람이 흘러나오거나 흘러들어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 어둠 속으로 들어가보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얼마전에 읽은 미야모토 테루의 <환상의 빛>에 나오는 주인공의 남편처럼,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봐도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기차가 오는 철로를 뚜벅뚜벅 걸어갈 수밖에 없었던 어떤 감정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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