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오래된 책

시월의숲 2016. 2. 25. 23:21

마음속에 그런 열망을 품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그것을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나도 알 수 없는 이유로 한 작가의 책을 전부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생각을 실행에 옮기고자 지금은 품절되고 절판되어 살 수 없는 책들을 중고로 구입했다. 이사가 잦아서 되도록 짐이 되는 물건들을 사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로 인해서 내가 읽고 싶고, 가지고 싶은 책들을 사지 못한다는 것은 더욱 견디기 힘들었으므로, 적어도 책만큼은 이사할 때의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사는 편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어느 한 작가의 책 전부를 사고 싶다는 생각을 할 만큼 좋아하는 작가가 없었으므로(혹 있다 하더라도 굳이 절판되어 구입할 수 없는 책들까지 사고자 하는 마음은 없었으므로), 지금 내 곁에 있는, 예전에 한 번 읽었으나, 어떤 분위기만 겨우 기억에 남은 책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니, 나를 사로잡은 그 열망의 정체가 무엇이었나 의아한 기분이 든다. 그리고 나를 사로잡은 어떤 열망보다도, 그로 인해 구입하게 된, '중고 책'이라는 의미와 물성에서 오는 묘한 느낌이 새로이 나를 사로잡는다. 나는 이번에 처음으로 새책이 아닌 중고 책을 구입하게 되었는데, 새책을 받아볼 때와는 또다른 느낌이 중고 책에는 있다. 이제 더는 공식적으로 출판되지 않는 책이라는 사실과 누군가의 책장에 오래도록 꽂혀 있었다는 사실, 또한 시간의 흔적이 느껴지는 표지나 속지의 빛바램 같은 것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특유의 아우라. 오래된 것들이 품고 있는, 축적된 시간의 결정체 같은. 그것은 분명 내 손 안에 있지만, 잠시라도 한눈을 판다면 바스라져 버릴 것 같은, 어떤 아득함 같은 것이다. 물론 그것은 오래된 책들이라면 당연히 품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처음부터 나와 '함께 오래되어 가는 것'과 '이미 오래되어 버린 것들'을 지금 내가 가지는 것에서 오는 미묘한 감정의 차이는 분명 존재한다. 나는 책이 아니라 어쩌면 오래된 시간을 간직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나는 전보다 조금 더 아득해지고, 적막해졌으나, 그만큼 더 충만해진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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