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내가 아닌 내 사진 속의 나

시월의숲 2016. 3. 29. 21:58

사진관에 가서 증명사진을 찍었다. 여권에 넣을 사진이 필요해서였다. 실로 오랜만에 증명사진이라고 하는 것을 찍은 것이다. 사진 찍는데 익숙하지 않아서 쭈뼜거리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 없었다. 사진사가 안경까지 벗으라고 하는 바람에, 나는 카메라가 아니라 허공을 바라보는 기분으로 찍어야만 했다. 인화된 사진 속의 내가, 내가 아닌 것만 같았다. 초점없이 흐릿한 눈에, 보정했음이 분명한 피부에도 불구하고 생기없는 모습은 어떻게 해도 감춰지지가 않았다. 적나라하게 나온 내 얼굴 사진을 받아드니 민망하고 서글픈 마음마저 들었다. 사진 찍히는 것이 꺼려지는 이유를 이제 확실히 알 것 같았다. 보기 싫은 나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도 노골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아무튼 내가 아닌 나 자신의 사진을 들고 여권 발급을 위해 시청에 갔다. 신청서에 영문 이름을 쓰고, 내 전화번호 뿐만 아니라 나를 아는 다른 이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쓰고, 지문 인식을 하고, 사인을 했다. 직원에게 여권 사진은 꼭 안경을 벗고 찍어야 하느냐고 물으니, 반드시 벗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사진 찍을 때 안경이 빛에 반사되어 얼굴이 잘 안나올 수 있어서 그러는거 아니겠냐고 말했다. 그리고는 노란색 영수증을 하나 주면서 4월 1일 이후에 다시 와서 여권을 찾아가면 된다고 했다. 나는 어쩌면 내가 아닌 내 사진이 찍힌 여권을 들고 외국에 나가게 될지도 모른다. 외국 공항의 직원들은 내가 아닌 내 사진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할까. 그들은 내가 안경을 쓰고 있다 하더라도 여권 속 내 모습과 나를 혼동하지 않고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아닌 나 자신의 사진이란 오로지 나만 볼 수 있고, 나만 알 수 있으며, 나만 느끼는 사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아닌 누군가의 여권을 들고 입국 심사대를 통과한다는 상상만으로 나는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하긴, 내가 외국에 나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나는 나 자신이 아닌 것처럼 느끼지기도 하니까. 그게 언제가 될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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