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스쳐지나가는 것과 스며드는 것

시월의숲 2016. 3. 5. 17:53

1.

두 권의 책을 읽었고, 영화를 보았으며, 어딘가를 다녀오기도 했다. 약속이 거의 없는 내게, 하루에 두 가지의 약속이 생기기도 했으나, 두 번 다 이루어지지 못했다. 약속이 취소되는 경우야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만, 하나의 약속으로 인해 다른 하나의 약속을 거절했고, 그 하나의 약속이 성사되지 못했으므로 나는 두 개의 약속이 취소된 셈이었는데, 그때의 기분은 무어라 표현하기 힘든 오묘한 것이었다. 그날, 마치 연인과의 데이트 약속에 바람을 맞은 사람처럼, 약간 허탈한 기분에 휩싸여 집으로 온 기억이 난다. 그렇게 열망하던 약속이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2.

몇 권의 책이란, 에두아르 르베라는 프랑스 태생 작가의 <자화상>이라는 소설과, 제발트의 <현기증. 감정들>이라는 소설이다. 그리고 영화는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레버넌트>다. 두 권의 책과 그 영화는 내게 깊은 인상을 주었으나, 나는 지금껏 그것에 대한 한 줄의 문장도 쓰지 못했다. 무슨 이유에선지 모르겠지만, 지금껏 무언가를 쓰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고, 어떻게 시작을 해야할지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마치 그 책과 영화에 대한 글을 청탁 받고 마감날짜를 지키지 못한 사람처럼, 알 수 없는 조바심이 일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그것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를 깨닫고 웃음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는데, 나는 누군가 이런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할까봐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내 자취방에서 창피함으로 인해 홀로 얼굴을 붉히기까지 했다.


3.

그동안 울진을 다녀왔고, 소수서원을 가보았다. 소수서원은 예전에 한 번 다녀온 적이 있었지만, 그곳이 어떤 풍경이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으므로 시간이 날 때 다녀오고자 한 것이다. 그날은 바람이 제법 불고 쌀쌀한 날이었는데, 나는 혼자 입장료를 지불하고 소수수서원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고요하게 풍경을 감상하고자 하는 내 바람은 무참히 짓밟히고 말았는데, 소수서원 바로 옆에 조성된 선비촌에서 무슨 행사를 하는지 마이크를 크게 틀어놓고 시끄럽게 떠들어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조용한 소수서원이 그 소음으로 인해 공격당하는 것을 무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커다란 망치로 머리를 탕탕 얻어맞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소수서원을 둘러보았다. 나는 서원보다도 오히려 서원으로 들어가는 길과 그 주변의 풍경들이 더 마음에 들었다. 하늘을 향해 거침없이 뻗어 있는 소나무들과 서원 옆을 고요히 흐르는 냇물과 마치 묵상하듯 그 옆에 자리잡고 있던 정자. 소음으로 인한 공격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그곳에 잠시 앉아서 흐르는 냇물에 내 쓸데없는 생각들을 흘려보낼 수도 있었을텐데.


4.

스쳐지나가는 것과 스며드는 것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동안 나를 스쳐지나간 것들 중 내 안에 스며든 것은 얼마나 될까. 우리는 일생동안 서로 스며들지 못하고 그저 스쳐지나가기만 하는 것은 아닌지. 내가 그동안 어떤 것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쓰지 못한 것은, 모든 사물들을 그저 아무런 감흥없이 스쳐지나갔기 때문은 아닌가.

'어느푸른저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난 봄의 안부  (0) 2016.04.07
내가 아닌 내 사진 속의 나  (0) 2016.03.29
오래된 책  (0) 2016.02.25
울진 가는 길  (0) 2016.02.22
감정들  (0) 2016.0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