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모든 것이 지나간다면

시월의숲 2016. 4. 19. 21:04

무슨 일이든 지나간다는 사실도 알고 있고, 지나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닌 일이 된다는 사실도 익히 알지만, 아는 것과는 별개로 어떤 일이 지나가기 전에 받아야만 하는 고통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모든 것이 지나가며, 지나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라지지 않는 고통을, 익숙해지지 않는 고통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는 것과 그것을 겪는 것은 분명 다르다. 몇 번이고 경험했던 일들이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고 매번 새로운 고통으로 다가온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혹 고통이 익숙해진다 하더라도 그것의 고통스러움까지 익숙해지는 것은 아니니, 매번 고통으로 인해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을 고통 보존의 법칙이라고 해야 할까. 내 대범하지 못함과 자동신경 반사처럼 곤두서는 내 신경들과 두 눈을 부릅뜨지 못하는 나약함이 나를 갉아먹는다. 내 목을 조른다. 나를 피폐하게 만든다. 나는 작아지고 작아져서 끝내 사라져 버릴 것이다. 나는 그것이 두려워 몸을 떤다.


내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기형도는 그렇게 썼다. 나는 그가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고통 속에서, 그것을 직시하며 끝내는 그것을 긍정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그 긍정이 체념의 다른 이름이거나, 그것의 풍경이 더없이 황량하고 서글프며, 고통 또한 사라지지 않는 것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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