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일요일 오후, 산책

시월의숲 2016. 5. 2. 00:52

조금 덥다 느껴지는 일요일 오후였다. 생각해보니 오월의 첫날이었다. 나는 책을 한 권 가방에 넣고 자취방을 나왔다. 인근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축구를 하고 있었고, 누군가는 야구를, 누군가는 열심히 걷고 있었다. 둘러보니 어느새 이팝나무에 꽃이 소복하게 피어었었다. 작년에 본 하얀 눈 같던 꽃을 아직 기억하고 있는데, 올해도 어김없이 피어서 시선을 사로잡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걸어서 차로를 벗어나 냇가가 보이는 둔치의 산책로로 접어들었다. 햇살이 눈부셔 손으로 얼굴에 그림자를 만들어가며 걸었다. 바람이 불어왔다. 나는 조금 쉴 겸해서 그늘이 진 벤치에 앉았다. 온 세상에 가득한 햇살과, 바람, 냇물과 새들, 푸른 나무와 서글서글한 나무의 그림자들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눈이 저절로 감겼다. 잠이 와서가 아니라 음미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눈을 감고 햇살과 나뭇가지를 통과해 불어오는 바람을 느꼈다. 나는 눈을 뜨고 주위를 다시 둘러보았다. 내가 앉아 있는 벤치 옆에 한 노인이 중절모를 쓰고 지팡이를 든채 앉아 있었다. 그 노인은 굉장히 거동이 불편해보이는 몸을 이끌고 아주 천천히 자신이 앉았던 벤치에서 일어나 바로 앞에 있는 나무로 다가갔다. 나무 앞에 선 노인은 손으로 나무를 짚고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나는 순간 그가 나무가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바람이 그 노인을 통과해서 나에게로 불어왔다. 하지만 노인은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자 무언가 쓰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나는 가방에서 펜과 작은 수첩을 꺼내서, 문득 떠오른 단어들을 끄적거리기 시작했다. 오월, 햇살, 바람, 노인, 나무 같은 것들을. 그리고 나를 얽메는 것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몇 명의 사람들이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와 내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까치와 참새 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노인은 그 자리에 없었다. 나무와 한 몸이 된 것인가? 나는 노인이 있던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이 그새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의아해서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 나는 페소아가 떠올랐다. 페소아라면 오늘 내가 보았던 모든 것들을 어떻게 느끼고 묘사할 것인가. 햇살에 대해서, 나무와 바람과 새들에 대해서, 노인에 대해서, 내 하찮은 산책에 대해서. 나는 어쩌면 그 노인처럼 이미 늙은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항상 양가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나를 괴롭게 한다. 나는 한없이 늙고 싶고, 한없이 젊고 싶다. 나는 사람들이 궁금하지만, 그들과 절대 만나고 싶지 않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나'이지만, 그 사실이 때론 못견디게 슬프기도 하고, 때론 견딜만하기도 하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그런 질문들을 던지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오월의 첫날이었고, 햇살이 가득한, 고요하지만 결코 고요하다고 할 수 없는 일요일 오후였다. 책은 여전히 가방에 든 채였다.

'어느푸른저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음이 이끄는 대로  (0) 2016.05.10
망각을 위하여  (0) 2016.05.04
바다라는 이름만으로도  (0) 2016.04.28
모든 것이 지나간다면  (0) 2016.04.19
  (0) 2016.0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