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어떤 용기

시월의숲 2017. 3. 22. 22:04

요리를 하는 일과 요리한 것을 먹는 일은 각기 다른 즐거움과 어려움을 느끼게 한다. 요리하는 일은 분명 즐거움을 동반하지만, 그 후 남겨진 설거지를 하는 일은 꽤 고단하다. 요리한 것을 내가 먹는 일은 일종의 성취감과 즐거움을 동반하지만, 내가 한 요리를 누군가에게 주는 것 - 즉 함께 먹는 일 - 은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처음에는 누군가에 줄 의도로 요리를 한 것이 아니라 당연히 내가 먹기 위해서 시작했지만, 요리를 하다보면 사실 적정량을 맞추기가 상당히 힘들다는 것을 알게된다. 늘 1인분 혹은 그보다 조금 많은 양을 기준으로 요리를 시작하지만 요리의 막바지에는 생각보다 많은 양(국이든 반찬이든 간식이든 간에)의 음식이 만들어져서 결국 다 먹지 못하고 며칠 뒤에는 음식물쓰레기통으로 직행하는 경우가 다반사인 것이다. 그렇게 버려질 음식들이 아까워서라도 누군가와 함께 먹으면 좋겠지만 그 또한 여의치 않다. 내가 만든 음식을 누군가와 함께 먹는 일은, 아까도 말했듯이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생각만으로는 그것이 그리 힘든 일인줄 알지 못한다. 하지만 막상 내가 한 음식을 누군가에게 주려고 포장을 하고 종이가방에 넣는 순간, 이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때부터 여러가지 걱정이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한다. 내가 한 음식이 맛이 없으면 어떻하지? 실제로는 맛이 없는데 예의상 맛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정말 창피한 일이 아닌가! 혹 먹을만 하더라도 배가 부르다거나 입맛이 없어서 먹기 싫은데 억지로 먹는 것은 아닌가? 날씨 탓에 음식이 상한 것은 아니겠지? 음식을 먹은 누군가가 배탈이라도 난다면! 이런 두서없는 걱정들이 불쑥불쑥 솟아나 종이가방에 넣은 음식을 뺐다가 다시 넣기를 수차례 반복하고는 결국 포기하고 마는 것이다. 자기가 만든 음식을 누군가에게 주는 행위는 어쩌면 자신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는 사람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것과 같을지 모른다. 내 사랑을 받아주세요. 내가 당신을 위해 어제 저녁부터 열심히 싼 김밥이랍니다. 혹은 당신을 생각하면서 오랜시간을 들여 만든 딸기잼이에요. 하지만 정작 상대방에게 그것은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사랑 고백보다도 더 거절하기 힘든 일인지 모른다. 누군가의 사랑 고백이라면 오히려 상대방의 감정 정리를 위해서 깔끔하게, 저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그러니 당신의 사랑을 받아줄 수 없군요, 라고 말할 수 있고 그것이 오히려 서로에게 덜 민망한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사랑이 아니라 음식이라면? 물론 결과는 모두가 다 기분이 좋아지는 일일 될 수도 있다. 마치 사랑을 고백하는 사람처럼 쭈뼛거리며 자신이 어제 저녁에 싼 김밥을 사무실 테이블 위에 무심히 올려놓는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어제 김밥을 만들다보니 너무 많아서 가져왔어요. 사무실의 직원들이 모여들어 하나 둘 김밥을 먹기 시작한다. 와, 이거 진짜 본인이 만든 거예요? 아침 못 먹었는데, 맛있어요. 김밥에 뭘 이렇게 많이 넣었어? 야, 대단하다! 평소와는 달리 아침 사무실 풍경이 달라진다.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사무실 가득 퍼진다. 진심은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게 마련이다. 언제 그랬냐는듯 음식을 주기 전의 망설임과 걱정은 사라지고 기분 좋은 웃음소리만 울려 퍼진다. 이런 즐거움은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하지만 음식을 나눠 먹기 전까지는 결코 알 수 없는 즐거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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