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여러 겹의 세계

시월의숲 2017. 3. 13. 23:53

굳이 닥터 스트레인지가 아니더라도, 이 세상에 여러 차원의 세계가 존재함을 느낀다. 차원이라는 말에 거부감이 들거나 뭔가 거창하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저 수많은 '겹'으로 이루졌다고 해도 무방하리라. 보이지는 않지만, 중첩되고, 이어지며, 교묘히 엮여 있는 수많은 세계. 그 속에 내가 살아간다. 나는 그 여러 겹의 중첩된 세계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넘나든다. 공간을 넘나들기 위해서 슬링링(영화 '닥터 스트레인지'에 나오는, 공간을 넘나들고 차원을 왜곡시킬 수 있는 마법의 링)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나는 아무런 마법의 장치를 통하지 않고도 겹겹의 세계를 자연스럽게 넘나들 수 있다. 오로지 걸을 수 있는 두 다리면 충분하다. 문득 내가 예전에도 이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기억이 났다. 찾아보니 언젠가 나는 이런 문장을 썼었다.


"둔치 아래는 다른 세상 같았다. 둔치 위에서의 차량의 소음과 신경과민의 속도와 신호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내가 이 도시에 와서 처음으로 아무런 목적없이 하천을 따라 걷기 위해 사택에서 나왔을 때만해도 이 정도일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단지 계단을 내려왔을 뿐인데, 그곳엔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내가 너무 호들갑을 떨고 있거나 쓸데없는 감정 과잉 때문이라고 누군가 말할지도 모르겠다. 다른 세상이라니. 다른 세상이라는 말을 함부로 쓰다니. 하지만 나는 단연코 다른 세상이라고 말하고 싶다. 둔치 위의 세상과 그 아래의 세상. 무언가를 두 부류로 나누길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세상은 둔치 위의 세상과 그 아래의 세상으로 나눌 수 있다고, 아무런 망설임 없이 말할 수 있으리라."


예전에는 단지 둔치 위의 세상과 그 아래의 세상이라고 분류했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다층적인 세계를 느낀다. 눈을 감으면 느껴지는 바람의 감촉과 햇살의 움직임, 나무의 수런거림과 새들의 지저귐, 벤치 아래를 기어가고 있는 이름모를 벌레들, 그 모든 것들의 세계가 지금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나는 마치 공간이동을 하듯 그들의 세계로 빠져든다. 그것은 내게 이 세상이, 딱딱한 사무실의 책상과 답답한 공기, 알 수 없는 단절과 어쩔 수 없는 허무로 가득한 세계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그 사실은 당연하게도 내게 적잖은 위안을 준다. 이러한 생각은 어쩌면 봄이 오고 있기 때문일까. 따뜻한 기운이 내 안의 무언가를 건드렸기 때문인가. 혹은 산책을 하고 돌아오는 길, 냇가에서 처음 만난 이름모를 소년이 내게 해맑게 인사를 했기 때문일까. 어쩌면 그 소년의 세계가 내 세계와 잠시 엇갈리듯 만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다른 삶을 살아가지만, 그래서 마치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과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득 찾아드는 우연한 인사가 다른 차원의 세계를 느끼게 해주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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