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그저 벚나무 아래를 걸었을 뿐인데

시월의숲 2017. 4. 10. 00:09

벚꽃을 보러간 건 아니었다. 다른 볼일이 있어 갔다가 벚꽃축제 기간이라는 걸 알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가게 되었다. 영화를 볼 생각은 없었다. 역시 다른 볼일이 있었는데 허탕을 치고나니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영화를 보았고, 벚꽃을 보았다. 마치 영화를 보기 위해, 벚꽃을 보기 위해 간 것처럼 생각되기도 했다. 아무렴 어떨까. 그건 그것대로 좋았다. 


영화는 홍상수 감독의 <밤의 해변에서 혼자> 였다. 지방의 소도시라서 큰 영화관에서는 개봉을 하지 않아 못보는가 했는데, 예술영화전용관에서는 상영을 하고 있었다. 평소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즐겨 보지는 않았지만, 이번 영화에서는 주인공인 김민희가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던 터라 호기심이 생겼다. 영화는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였고, 김민희 역시 본인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듯 했다. 감독과 배우의 이야기가 영화 속에 저런 식으로 투영되기도 하는구나 생각하니 뭔가 신기하기도 하고 재밌기도 했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영화감독이면 영화로 말하는 것이 가장 현명하고도 효과적인 일임을 이미 알고 있는듯 했다(하지만 인터뷰에서 감독은 자전적인 이야기가 아니라고 말했다). 이번 영화는 예전에 홍상수 영화를 보았던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을 받았는데, 그건 배우들의 연기가 무척이나 연극적이라는 것이었다. 예전의 홍상수 영화 속 배우들은 뭐랄까, 연기를 한다는 느낌 보다는 현실 속 일상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고(폭로하고) 있다고 느꼈고 그래서 매우 현실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번 영화 속 배우들은 어딘가 모르게 연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지금 내가 다시 예전의 홍상수 영화를 본다면 어떻게 느낄지 모르겠다). 그건 배우들 간의 대화가 실제로는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무척 문어체적이라고 느낀 것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하지만 그건 감독의 의도처럼 느껴졌고, 그렇게 함으로써 얻어지는 효과는 아마도 비현실 아니, 초현실적인 느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바닷가에 누워 잠들었던 영희를 깨웠던 남자에게 영희가 하는 말처럼. "꿈을 꾸었어요."


영화를 보고 나와서 점심을 먹었다. 영희가 <밤의 해변에서 혼자>였다면, 나는 <낮의 도시에서 혼자>였다. 나는 혼자 점심을 먹을 만한 곳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다 결국 파스타 가게로 들어갔다. 그건 아마도 영화 속 영희가 외국 친구 집에서 먹던 음식이 파스타였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녀는 계속 배가 고프다며 파스타를 다 먹고 또 먹었다. 나도 영희처럼 배가 무척 고팠는데, 파스타를 주문하고도 30분이나 넘게 음식이 나왔다. 점심을 먹고 벚꽃을 보러 갔다. 축제 기간이 아니었다면 좋았겠지만, 벚꽃이 만개할 때 축제를 여니 어쩔 수 없이 축제기간에 벚꽃을 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들에게서 얻는 즐거움도 있었다. 사람들은 그저 벚꽃나무 아래를 왔다갔다 했다. 나 역시 몇 번이고 벚꽃나무 아래를 왔다갔다 했다. 그저 그렇게 걷는 것만으로도 마냥 좋을 수 있다는 걸, 그 좋음이 다른 누군가에게 전이될 수 있다는 걸 모두들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는듯 했다. 그저 벚나무 아래를 걸었을 뿐인데, 그것이 마치 축복처럼 느껴지다니. 나는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막무가내로 우는 아이와 어쩔 줄 몰라하는 부모, 벤치에 앉아 붕어빵을 나눠 먹던 노부부, 아직은 화장이 어색하지만 그래도 한껏 치장하고 나온 여학생들과 그들을 힐끗힐끗 쳐다보는 남학생들, 민소매 셔츠를 입은 남자와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자. 그곳에 나온 모든 사람들이 벚꽃의 세례를 받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와 벚꽃잎이 날릴 때 아마 사람들의 마음도 함께 흔들리겠지. 벚나무 아래에 마냥 있고만 싶었다. 너무나 아쉽고 아쉬워서 사진을 찍어보았지만 사진으로는 벚꽃의 감흥을 담아두기엔 역부족이었다. 벚나무 아래에 누워 잠들고 싶었다. 영희가 바닷가 모래사장에 누워 잠든 것처럼. 누군가 나를 깨운다면 나또한 이렇게 말하겠지. "꿈을 꾸었어요. 무척 달콤하지만 씁쓸하기도 하고 기쁘지만 고독한 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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