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어떤 비참

시월의숲 2017. 2. 19. 15:28

나는 이 글을 112일부터 쓰기 시작해서 23일까지 썼다. 특별히 할 말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단지 내가 내 일상에 대해서 쓰듯 그렇게 나에 대해서, 내 주위의 사물에 대해서 쓰고 싶었다. 집에서 혼자 이런 쓸데없는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이 어쩔 수 없이 비참하다 생각되기도 했는데, 그건 그때 읽은 정지돈의 소설에 나오는 문장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어쨌거나 하루하루 조금씩 글을 이어서 쓰다보나 생각보다 조금 긴 글이 되었다. 원래는 이런 식으로 쓸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쓰지 말아야겠다는 생각 또한 없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이런 식으로 이 무의미한 생을 견디고 있는 것이다.

 

 

*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은 곳에서 당분간 지내게 되었다. 원래 지내고 있던 직장의 사택이 공사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는다고 했지만, 공사라는 것이 그렇듯, 언제 완공될지는 모를 일이다. 언젠가 끝나긴 하겠지만, 그게 언제가 될지 정확히 알 수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일과 시간에 업무를 보면서 블로그에 들어올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공사가 다 완료될 때까지는 블로그에 자주 들어와 보지 못하겠지. 하지만 생각해보면 내가 내 블로그에 자주 들어올 일이 있는지 의문이다. 블로그에 자주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 서핑을 위해 블로그 핑계를 대는 것은 아닌가? 인터넷이 연결되어 있으면 아무 하는 일이 없어도 몇 시간 씩 인터넷 여기저기를 방문하면서 시간을 보내니 말이다. 그러다 생각나면 블로그에 들어와 글을 올린다. 나는 왜 거의 방문하는 이 없는 블로그에 글을 올리는가? 하긴, 개인 일기장이나 다름없는 이 공간에 왜 글을 올리는지 자문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건 일기를 왜 쓰는가, 라는 질문과도 같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건 너무나도 자명해서 물어볼 필요가 없는 것이거나, 물어봐도 딱히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인 것이다. 하지만 블로그에 자주 글을 올리지도 않으면서, 익명의 방문객들이 많아서 그들과 소위 소통하는 것도 아니면서 자신이 자신의 블로그를 자주 방문하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어딘가에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 때문인가. 하지만 그건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어쨌거나 블로그는 내 사이버 일기장이고, 나는 내 블로그를 가장 많이 방문하는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어떤 소설가가 그랬지. 자신의 글을 가장 많이 읽어보는 사람은 아마도 자기 자신일 거라고.. 지금의 내가 바로 그렇다.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은 곳이란, 바로 내 고향집이다.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쭉 자취생활을 하다가 사택 공사라는 어쩔 수 없는 이유로 집에서 다니게 되었다. 집은, 몇 년 전 리모델링을 해서 예전에 내가 살았던 집의 모습과는 좀 다르긴 하지만, 구조는 크게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집에 오면 어쩔 수 없이 옛날 생각이 난다. 그러니까 할아버지의 냄새가 짙게 배어 있던 그 집 말이다. 나는 그 집에서 할아버지 없이, 할머니도 없이 혼자 일어나고,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직장에 다니며, 텔레비전을 보고 잠을 잔다. 내 생활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것이 없지만, 내 주위의 환경은 무섭도록 빠르게 변한다. 나도 예전과는 모든 면에서 많이 달라졌겠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속에 있는 어떤 감정, 슬프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고, 아련하기도 한, 그 감정은 변하지 않는다. 모든 기억들이 망각의 늪으로 빠져들어 갈 때에도 어떤 기억은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나 자신도 시간 속에서 변해가고 있음을 이제는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내가 어렸을 때는 결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나이에 도달해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이미 그곳에서 많이 흘러왔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지금 내 상상 밖의 시간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상상 밖의 시간 속에 살고 있다는 건, 정말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므로, 나는 늘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고, 한강의 소설 <>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내가 누군가의 죽음으로 삶을 이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한 때 내 곁에 있었던 사람들, 고통을 주거나 기쁨을 주었던 사람들은 지금 다 어디에 있는가. 비운 만큼 채울 수 있다고 하지만 한 번 떠난 사람은 되돌아올 수 없고, 다른 어떤 사람으로도 채워지지 않는다. 나는 예전의 나로부터 얼마나 많이 떠나온 것일까. 앞으로 또 얼마나 떠나야 하고, 떠나보내야 하는 것일까.

 

고향집에서 다니기 위해 필요한 짐과 불필요한 짐을 옮겨야 했는데, 무슨 짐이 그렇게나 많은지! 이사를 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나는 정말 불필요한 것들을 많이도 가지고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모든 것들이 언젠가는 내 곁을 떠나고, 사라져버린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정작 나 자신은 그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던 것일까. 몇 년 동안 아무런 생각 없이 모았던 각종 영수증과 고지서, 영화티켓, 승차권 등이 서랍 한가득 쌓여있는 것을 보고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그것들이 나의 역사를 설명해 줄 수 있는가. 나는 왜 그런 것들을 마치 연인에게서 온 편지처럼 그렇게 소중히 보관하고 있었던 것일까. 짐을 정리하면서 내가 모았던 영수증들을 하나씩 찢어서 쓰레기 종량제 봉투에 넣었다. 그 행위가 마치 내가 살아왔던 과거와 작별하는 의식처럼 느껴져서 나는 조금 쓸쓸하고도 경건한 기분이 들었다. 인간은 어쩌면 끊임없이 무언가를 버리고, 흘려보내야만 하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은 자신이 만든 영수증 더미에 묻혀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이사를 할 때마다 어쩔 수 없이 이런저런 생각이 드는 걸 보면,, 이사라는 것 자체가 어쩌면 철학적인 행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인적 드문 길을 따라 걷는 산책이 그러하듯이, 이사 또한 그러한 것이다. 그 둘은 무언가를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준다는 면에서 닮았다. 어딘가에 이사라는 행위의 철학적 사유를 담은 책이 있지 않을까? 제목은 아마도 이사의 철학혹은 이삿짐에 담긴 철학적 사유’, 또는 이삿짐에 철학을 담다쯤 될지도. 아직 이런 책이 나와 있지 않다면 누군가 내 대신 멋지게 써주었으면.

 

내가 지난 몇 년간 모아 온 영수증을 버렸듯이, 쓸데없이 거추장스러운 내 감정도 말끔히 정리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어쩐지 그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이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고 하더니, 정작 나 자신의 마음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 아니,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가슴으로는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이유 없이 화를 내고, 금방 기뻤다가 순식간에 슬퍼지는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몇 번이고 경험해야만 했다. 누군가는 이런 나를 보며 히스테리가 아닐까 걱정했고, 누군가는 도대체 무슨 이유로 저러는지 알 수 없어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혹 눈치 빠른 누군가는 자신만의 짐작으로 전혀 엉뚱한 오해를 하기도 했다. 어쩌면 내가 나만의 생각으로 상대방을 오해의 눈초리로 줄곧 바라봤는지도 모르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내 예상은 빗나갔고, 혹 빗나가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건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나를 바라보는 타인들의 시선에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진실이 무엇인지 결코 알 수 없으리라. 안다고 하더라도 결코 발설하지 않으리라. 그것은 그들이 용기가 없기 때문이며, 그 용기는 우리나라 문화 전반에 깔려 있는 자신과 다른 타인에 대한 혐오 때문으로, 그것은 그들 자신들도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의 머릿속에 견고하게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각이 결코 영원불멸의 가치가 아님을 알지 못한다. 그만큼 자신과 다른 타인에 대한 혐오는 역겨울 정도로 끈질기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아예 그런 생각을 하지 않고, 하더라도 결코 입 밖으로 내지 않는다. 어쩌면 그건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비난하는 것보다 침묵하는 것이 훨씬 현명한 일이니까. 물론 그들이 현명하기 때문에 침묵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나 자신에 대한 마음의 정리를 하기 위해 꺼낸 말이었는데, 정작 내가 타인에 대한 비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들이 나를 비난할 자격이 없는 것처럼 나또한 그들을 비난할 자격은 없다. 그 누구도 다른 누구를 비난할 권리 같은 것은 없다. 우리는 다만 우리의 생각을 표현할 뿐인데,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문제다. 그리고 사실 그들은 나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다. 어쩌면 그것이 단순하고도 명쾌하며 어떤 오해도 하지 않고, 어떤 오해도 받지 않는 유일한 진실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은 나 혼자만의 착각 속에서 나왔으며, 착각은 그저 착각일 뿐, 어떤 의미도 가지지 못한다는 것. 나는 그저 냉수 한 잔 마시고 정신 차리면 되는 것이다. 거기에 어떤 연민도, 슬픔도, 아픔도 느낄 필요가 없다. 내 이런 설명하기 힘든 감정은, 그것이 바로 내가 처음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처음으로 강렬한 감정의 흔들림을 느끼는 것. 나는 지금 그 감정에 적응중이다. 나도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구나, 하지만 이건 너무 아프지 않은가. 이건 너무 속상하지 않은가. 이건 너무 슬프지 않은가. 이건 너무 불공평하지 않은가. 나는 어쩌면 나를 너무 사랑하는 건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들이 내 자의식의 과잉 혹은 이기심에서 나온 감정일지도 모르는데. 내가 화가 나는 건 바로 나 자신 때문일지도 모르는데.

 

어쨌거나 나는 이런 감정이라도, 감정을 나타내는 원론적인 단어들, 그러니까 슬픔, 기쁨, 아픔, 분노, 시기, 질투 같은 단어들을 쓰지 않고 내 감정을 나타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느낌표를 남발하지 않고, 슬프다는 표현을 쓰지 않고 슬픔을 표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지금 은유나 상징 따위의 표현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학문적으로 분석하려 드는 것은 내 성향에 맞지 않는다. 나는 그저 슬픔의 감정을 슬프다, 라는 일차원적 단어로 표현하는 것에 약간의 지루함을 느낀다. 그것은 그것대로 좋을 때도 있겠지만, 어디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이 그렇게 단순한 것이던가. 혹 그것이 단순한 것이라 하더라도 단순하지 않게 그 단순함을 표현하고 싶다. 나와 나를 둘러싼 모든 사물들을 좀 더 다양한 색채와 질감으로 표현하고 싶은 것이다. 마치 예전에 수채화를 그릴 때 그랬던 것처럼. 수십 번의 붓질로 평면의 스케치북에 입체적인 형상이 나타난다. 나는 그것이 무척이나 신기해서 몇 번이고 붓질을 했다. 하지만 너무 많은 붓질은 그림을 탁하게 만들었는데, 그렇게 완성된 그림을 보는 것은 괴로웠다. 그것은 아마도 그림 속에 내 욕심이 보였기 때문이리라. 칙칙하고 지저분한 욕심. 하지만 바로 그것이 내가 미술을 좋아하게 된 이유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그림을 통해서 내 욕심을 직시할 수 있고, 그것을 덜어내기 위해 내가 노력하고 있다는 것. 글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내가 이 글을 쓰기 시작한 때(112)로부터 한 15일 정도 지났다.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글을 쓰다 보니 매일 조금씩 써보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느슨한 생각으로 조금씩 글을 이어나갔다. 무슨 통일된 주제가 있는 것도 아니요, 특별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저 내가 일상에 느꼈던 소소한 감정의 변화와 어떤 느낌에 대해서 쓰고 싶었다. 거창하게 말해 의식의 흐름대로 쓰고 싶었다고나 할까. 말하자면 그저 생각나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쓰고 싶었다는 말이다. 거기에는 일종의 외로움이랄까 고독 같은 것이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언제나 혼자였지만 고향에 와서도 혼자일 수밖에 없음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고향집에 여전히 남아있는 흔적이 내 뼛속 깊숙이 스며들어 있는 어떤 흔적과 만나, 타지에 홀로 있을 때보다 내면의 슬픔과 좀 더 가까워진 느낌, 어떤 기억과 대면하고 있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마침 나는 이런 문장을 읽었다. ‘나는 가끔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고 했다. 아무 말이나 하고 싶지만 아무 말이나 들어줄 사람이 없다고 했다. 에리크는 자신도 동일한 문제를 가지고 있으며, 우리는 모두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는 내게 글을 쓰라고 말했다. 글을 쓰면 삶이 조금 더 비참해질 거라고, 그러면 기쁨을 찾기가 더 쉬울 거라는 게 그의 말이었다.’

 

정지돈의 소설에 나오는 문장인데, 나는 저 문장을 읽자마자 의심했지만 그것은 그 문장이 진실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었기에 조금은 두렵고도 반가웠다. 나는 가끔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고, 아무 말이나 하고 싶지만 아무 말이나 들어줄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그렇게 글을 쓰고 싶어 하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하지만 글을 쓰면 삶이 조금 더 비참해질 거라고, 그러면 기쁨을 찾기가 더 쉬울 거라는 말에는 고개가 갸우뚱해지다가도 이내 끄덕여졌다. 비참하지 않은 사람들은 글을 쓰지 않는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정확히 알거나, 아무 말이나 들어줄 사람이 있는 사람들은 애써 글을 쓰지 않는다. 그렇게 단정적으로 말하고 싶어진다. 우리는 모두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나는 아직까지 나와 같은 문제를 가진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이런 쓸데없는 글을 쓰는 것이다. 어쩌면 글이란 오롯이 쓰는 자를 위한 행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전적으로는 아닐지라도 그것이 글 쓰는 행위의 일차적(단계를 나눌 수 있다면)인 소용이라면 소용인 것이다. 좀 거창하게 말한다면, 글은 그것을 읽는 자를 변화시키지는 못할지라도 그것을 쓴 자는 구원할 수 있다고.

 

이 글의 끝은 어떨까.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궁금했다. 이 글을 어떻게 끝낼 것인가가 아니라, 이 글이 어떻게 끝날 것인가. 하지만 결론은 이거다. ‘없다’, 는 것. 결론은 없다. 나는 그저 내 생각을 쓸 뿐이고, 내 생각의 끝이 곧 이 글의 끝이다. 결론이 있다면 그것이다. 말장난 같지만 결국 결론이 없다는 게 결론인 셈이다. 삶은 허무로 이루어져 있고, 글 또한 그렇지 않겠는가. 이 글의 처음이 생각나지 않는 것처럼, 이 글의 끝 또한 생각나지 않는다. 때론 이런 끝맺음도 있는 것이다.

(2017. 1. 12. ~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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