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서원과 서원을 둘러싼 것들

시월의숲 2017. 6. 4. 23:00








햇살은 가득했으나 생각보다 덥지는 않았다. 바람이 적당히 불었고, 그늘에 있으면 더운 줄 몰랐다. 주말에 집에만 있기가 답답하여 예천에 있는 도정서원이란 곳을 가기로 했다. 예천이 내 고향이지만, 그런 곳이 있었어? 의아해하며 찾아갔다. 조선 선조 때 좌의정을 지낸 약포 정탁 대감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었고, 후에 강학당이 세워지면서 도정서원으로 명칭이 바뀌었다고 안내문에 적혀 있었다. 서원을 5~6킬로 정도 남기고는 도로에 차가 한 대도 지나가지 않았다. 그러니까 호명면으로 접어들면서부터일 것이다. 사방에 가득한 햇살과 도로 양 옆으로 쭉 심겨진 나무의 푸르름 때문에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아, 굳이 서원을 보지 않더라도 이 길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구나,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저 드라이브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렇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도착한 도정서원은 생각보다 정리된 느낌은 아니었는데, 아직도 공사자재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무슨 이유에선지(아마도 곰팡이가 피었기 때문이 아닐까) 서원 건물의 문짝들이 전부 떼어져 있었다. 서원 앞에 있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었는데, 그 앞으로 탁 트인 전망이 눈에 들어왔다. 전체적으로는 아담하고 나름 고풍스러운 느낌이 나는 소박한 서원이었다. 천천히 서원을 둘러보면서 어째서 나는 서원을 보고 싶어하는 것일까 생각했다. 왜 나는 이런저런 서원이나 절, 정자 같은 곳을 찾아가는 것일까. 생각해보니 나는 서원을 보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나는 서원이 아니라 서원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 그 풍경들을 보고 싶고, 걷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서원이 지어지게 된 내력에 대해서 알면 더 좋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보다 서원을 둘러싼 풍경이 먼저 나를 사로잡는다. 서원이나 절 혹은 정자 같은 것들은 늘 수려한 풍경 속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옛 조상들의 풍경을 보는 안목에 나는 늘 감탄을 금치 못한다. 그리고 시간의 흐름! 그곳에서의 시간은 잠시 잊혀진다. 나는 그곳에서 시간의 주박에서 잠시 풀려난 채 냇물을 바라보고, 나무와 수풀 속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걷고 숨쉰다. 어쩌면 서원이나 옛 문화재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신비한 힘이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

'어느푸른저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삼척에서  (0) 2017.06.12
소나무숲을 거닐다  (0) 2017.06.06
별들의 축제  (0) 2017.05.28
장미의 계절  (0) 2017.05.21
어쩌다 춘천  (0) 2017.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