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서(書)

모든 것이 생전 처음인 듯

시월의숲 2017. 6. 25. 22:43

이 순간 이런 모든 것을 오직 자신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누군가가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 모든 것을 오늘에야 처음으로 삶의 표면에 당도한 성인 여행자의 눈길로 응시할 수만 있다면! 태어난 이후 아무것도 배우지 않았고, 이 모든 것에 미리 정해진 의미를 부여할 줄을 모르고, 사물들에게 부여된 기존의 표현이 아닌 사물 스스로의 의지로 나타내는 자기표현을 체험할 수 있는 여행자. 생선 파는 여인에게 생선 파는 여인이라는 명칭과 행상인이라는 개념과는 무관한 한 인간의 실체를 파악하기. 마치 신이 경찰관을 바라보듯 경찰관을 바라보기. 모든 것을 생전 처음인 듯이 감각하기. 인생의 신비를 종말론적으로 공표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꽃잎을 직접 만지며 감각하기.(757~758쪽,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봄날의책,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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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다른 말로 아무런 편견 없이 모든 사물을 바라보라는 것과 같은 말이 아닐까. 오직 자신의 눈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어떤 사물의 실체를 생전 처음 대하듯 그렇게 감각한다는 것은. 어쩌면 지금 내게 필요한 건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직접 상대하기도 전에 미리 겁먹고 날뛰는 모습과 닥치기도 전에 미리 걱정과 불안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나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나는 지금 처음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누군가 종용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내 안의 나태와 이기심이 나를 이끌고 가는 것을 보고만 있지 못하는 것인지도. 그렇다면, 그래야만 한다면 그러할 것이다. 나는 두 팔을 벌려 내게 다가오는 것들을 기꺼이 맞으리라. 나를 시험에 들게 하는 모든 불안의 짐짝들을 보란듯이 깨부셔야 할 것이다. '현실이라는 꽃잎을 직접 만지며 감각'해야만 한다면. 진정 그래야만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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