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서(書)

나의 고립

시월의숲 2017. 7. 27. 23:20

나의 고립은 행복을 도모하기 위함이 아니며, 내 영혼의 능력은 행복에 도달하는 방법을 모른다. 나의 고립은 안식을 발견하기 위함도 아니며, 그 어떤 인간도 진정 안식을 발견하지는 못한다. 안식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안식을 상실하지 않는 인간뿐이다. 나의 고립은 오직 잠을 위한 것이다. 소멸을, 겸손한 체념을 위한 것이다.

나의 초라한 방 사면의 벽은 나에게 감옥인 동시에 황야이며 침상인 동시에 관이다. 내 가장 행복한 순간은 그 속에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꿈조차 꾸지 않고, 불행한 식물처럼 가만히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오직 이끼만이, 삶의 표면에 달라붙은 채 자라날 것이다. 아무것으로도 존재하지 않는 부조리한 의식을, 죽음과 소멸의 전조를, 나는 가만히 음미한다.(762쪽,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봄날의책, 2014.)



*

그는 왜 그토록 고독을 말하는가. 왜 그토록 잠을, 소멸을, 상실을, 부조리를, 죽음을, 진정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열렬히 바라는가. 그런데 바란다는 말이 맞기는 한 것인가? 어쨌거나 그가 그토록 많이, 반복해서 이야기하는 것들을 가만히 생각해본다. 페소아의 <불안의 서>는 그야말로 그의 그러한 심리가 만들어낸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불안하고, 고독하며, 슬프다기보다는(실제로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반대의 감정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그것이 이 책의 아이러니이자 매력이다. 그것은 이상한 일이고, 신기한 일이다. 마치 하품의 하는 사람 옆에 있으면 하품이 전염되듯이, 아니, 그것과는 좀 다르게, 그가 하고 있는 모든 말들을 따라가다보면 불안이 전염되는 것이 아니라 어쩐지 알 수 없는 위안이 소리없이 감싸는 것을 느낀다. 그의 피곤, 잠, 아무것도 아닌 자신, 모든 부조리가 정말 아무것도 아닌것이 되어버리는 신기한 경험. 그저 식물처럼(불행하긴 하지만), 삶의 표면에 달라붙은 이끼처럼, 그저 그 모든 것을 가만히 음미하는데서 오는 어떤 희열이, 그의 글에는 있다. 그것이 내가 이 책을 오랜시간 놓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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