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지만 결코 그때와 같지 않음을

시월의숲 2017. 7. 11. 22:17

다시 처음으로 돌아온 기분이다. 맨 처음 출발했던 그곳으로 다시. 하지만 나는 안다. 그동안 많은 곳을 돌아서 이곳에 왔다는 것을. 그리고 돌아온 지금은 결코 처음과는 같지 않음을.

 

발령이 나고 일주일 동안 입맛이 없어 밥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이상하게도, 내가 원해서 난 발령임에도 불구하고 누군갈 자꾸 원망하게 되는 심정이 된다. 원했음에도 진정 내가 원한 것은 아니었던가. 알 수 없는 자책과 업무에 대한 부담감으로 인해 내가 봐도 나 스스로가 많이 수척해져서 조금 불안하기까지 했다. 내가 왜 이러나, 하고. 하지만 어제 새로운 부임지에 첫 출근을 하고 오늘 이틀째를 맞이하니, 혼란스러웠던 기분이 진정되고 오히려 담담해지는 것을 느낀다. 많은 사람들의 걱정과 격려, 응원 때문인지, 어떤 자포자기의 심정 때문인지 모르겠다. 아마 그 두 가지 다일 것이다. 이제 돌이킬 수 없다는 것. 한 번 발을 들인 이상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담담하게 만든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을 다시 한 번 더 되새기게 되는 요즘이다.

 

이사하는 날, 마침 장마로 인해 비가 왔다. 출발할 때는 비가 안와서 안심했는데, 얼마 못가서 비가 세차게 퍼부었다. 이삿짐센터 직원에게 집 주소를 알려주고 내가 먼저 출발을 했는데, 도로를 얼마 달리다보니 갓길에 천막을 급하게 둘러치고 있는 트럭을 발견했다. 차로 지나치면서 흘깃 보니, 내 짐을 실은 트럭이었다. 분명 비가 올 거라는 일기예보를 들었으면 그냥 트럭이 아니라 컨테이너 박스로 된 트럭을 가지고 와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하니 저들의 무심함에 잠시 화가 났다. 아니나 다를까, 집에 와서 짐을 내리는 중에도 비가 쏟아져서 내 짐들이 비에 홀딱 젖었다. 컴퓨터나 가전제품들이 걱정이 되었으나 다행히도 괜찮았다. 하지만 아끼던 책이 일부 비에 젖었다. 나는 비를 맞은, 한 번도 읽지 않은 새 책을 바라보며 망연자실했다. 책은 그냥 내 차로 옮길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는데 어쩔 수 있나 생각하며 마음을 추스르고 책을 말리기 위해 방에 펼쳐놓았다. 나중에라도 이 책들을 보면 비를 맞으며 이사하던 생각이 날 것이다.

 

내 온 마음과 온 몸을 지배하던 거대한 슬픔이 조금씩 걷혀질 수 있을까. 오늘은 며칠 계속 내리던 비가 그치고 태양이 비췄다. 먹구름이 걷히듯 그렇게 내 슬픔도 점차 사라지기를 바라지만, 그건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노릇이니 그저 비를 바라보듯, 구름을 바라보듯 내 슬픔을 지켜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다보면 언제 비가 왔냐는 듯, 눈부시게 빛나던 오늘의 하늘처럼 되어 있지 않을까. 구불구불한 길가에 펼쳐진 녹색의 나무들과 푸른 밭, 새와 이름모를 동물들이 뛰어다니는 이곳에서 나는 어쩌면 좀 더 성숙해질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조심스레 해본다.(2017. 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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