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서(書)

알 수 없으므로 나는 고통을 느낀다

시월의숲 2017. 9. 8. 18:22

나는 매 순간 무엇인지 모를 힘에 떠밀려 항시 다른 것을 생각하게 된다. 마치 몽롱한 환각에 빠진 것처럼,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것, 한번도 되어보지 못한 것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찰싹거리는 연못의 물소리와 같은 존재하지 않는 농장의 소리에 뒤섞여버린다. … 나는 느끼려고 애를 쓰지만, 어떻게 하면 느낄 수 있는지 더 이상 알지 못한다. 나는 나 자신의 그림자가 되어버렸고, 나는 내 존재를 그림자에 내어주었다. …… 나는 나의 그림자가 아닌 나의 실체를 악마에게 팔아넘겼다. 나는 고통스럽지 않기 때문에, 고통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고통스럽다. 나는 살아 있는가 아니면 그저 살아 있는 척하는 것인가? 나는 잠들어 있는가 아니면 깨어 있는가?(774쪽,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봄날의책, 2014)

 

 

*

불안과 잠, 꿈과 더불어 페소아가 가장 많이 언급하는 말 중에 하나는 바로 '알 수 없음'이다. 느끼려고 애를 쓰지만, 어떻게 하면 느낄 수 있는지 알 수 없고, 살아 있는지 아니면 살아 있는 척 하는 것인지 알 수 없고, 잠들어 있는지 아니면 깨어 있는지 알 수 없다. 그것은 '모름'과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페소아는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알 수 없는' 것이다. 어쩌면 그 근원적인 '알 수 없음' 때문에 불안하고, 불안하기 때문에 잠 아닌 잠을 원하며, 꿈 아닌 꿈을 꾸는 것인지 모른다. 무엇인지 모를 힘. 페소아는 알 수 없는 힘에 떠밀리는 자신을 들여다본다. 그는 그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알 수 없는 장소에서, 알 수 없는 감정들에 휩싸인 채, 알 수 없는 고통을 느낀다. 페소아는 페소아의 그림자에 불과하고, 그림자가 바로 페소아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불안의서(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외부세계가 곧 내적 실제인 인간  (0) 2017.09.30
막연한 예감  (0) 2017.09.16
  (0) 2017.08.15
나의 고립  (0) 2017.07.27
모든 것이 생전 처음인 듯  (0) 2017.0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