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나만의 집

시월의숲 2017. 8. 19. 17:59

내가 정말 잘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에 시달렸다. 그때 나는 은행의 대출서류에 사인을 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 내 소유의 집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만의 공간에서 나만의 라이프스타일로 나만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랐다. 왜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 소유의 집이라는 걸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것이다. 나는 언제나 직장과 가까운 곳에서 원룸을 얻어 생활하거나 운좋게 사택에서 생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그렇게 여러 군데를 옮겨다니는 삶을 지속하면서도 한번도 내 집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내가 생활할 수 있는 자그마한 방 하나면 충분했다.


그렇게 지금껏 생활해 왔는데, 이상하게도 어느 순간부터 나만의 방을 벗어나 나만의 안락한 집을 가지고 싶다는 열망에 휩싸였고, 급기야는 내가 가진 엄청난 귀차니즘에도 불구하고 아파트를 보러 다니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나는 마치 귀신에 홀린 것처럼 집에 대한 열망이 커졌고, 몇 군데 아파트를 보러다니던 끝에 결단을 내리게 되었다. 그곳은 도청이 옮겨온지 얼마되지 않은 신도시였고, 세종시처럼 한창 아파트와 제반시설들이 들어서고 있는 중이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점차 완성되어가고 있는 곳이었지만, 나는 어쩐지 그곳이 다른 곳에 비해서 마음에 들었다.


마음에 들었다는 것은 물론 여러가지 편의시설과 향후 투자가치에 대한 낙관 때문은 아니었다. 나는 그런 것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나는 다만 내가 앞으로 살 곳을 찾기를 원했다. 내가 삶을 이어나가고, 여유를 즐기고, 피로를 풀어줄 수 있는, 모든 긴장과 불안과 고통으로부터 나를 잠시 놓아줄 그런 곳 말이다. 그곳의 환경이 내 그런 바람을 얼마간 채워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처음부터 아파트라는 형태의 집을 원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사실 아파트라는 닭장 같은 형태의, 차갑고 견고하며 무개성적인 시멘트의 숲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내가 진정 원한 것은 단독주택이었고, 번잡한 중심으로부터 조금 떨어져 있기를 원했다. 주위에 나무가 우거진 숲이 있거나 야트막한 언덕 혹은 낮은 산이 있으면 좋겠고(그래서 언제든 산책을 할 수 있는 곳이면 좋겠고), 작은 실개천이 흐르는 곳이면 더할 나위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방이 조용해서,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산새소리와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들리는 그런 곳 말이다. 하지만 그건 아직 내게 다가오지 않은 기회(하지만 언제든 잡을 수 있는 기회)처럼 생각되었고, 어쩌면 아파트라도 주위에 그런 환경이 있다면 지금의 내가 살기에는 별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쨌건 나는 아파트를 계약했고, 급기야 은행의 대출까지 받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지. 대출서류에 사인을 하고 있으니, 내가 나만의 집을 가지고자 했던 처음의 열망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음을 느꼈다. 누군가 내게 새로운 집에 가게 되어 기분 좋지 않느냐고, 하루라도 빨리 새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가 떠올랐다. 아파트의 입주가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사할 생각을 하지 않고 너무나 느긋하게 지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리라. 나는 대답했다. 아니, 굳이 빨리 들어가야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고. 그렇게 말을 하고 나자, 나 자신을 한때 휘감았던 어떤 열망이 식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 나는 지금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 것인지, 이것이 진정 내가 원하는 것인지. 내가 원한 것은 내 경제적인 능력을 훨씬 상회하는 크고 비싼 아파트가 아니었음을.


하지만 이미 돌아킬 수 없었다. 나는 그대로 대출서류에 사인을 했고, 은행을 나왔다. 대출금 외에 내가 그동안 모아왔던 돈을 모아서 통장에 넣어놓고 은행에 연락만 하면 아파트의 잔금은 치러질 것이다. 그리고 나면 적당한 때에 입주를 하면 되겠지. 그렇게 나는 아파트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아파트의 숲에서 살게 될 것이다. 내가 조금 위안이 되는 것은 그 아파트를 둘러싼 자연환경이었다. 아파트를 둘러싸고 있는 숲과 산들 말이다. 지금 나는 너무 많은 것을 원하는 건지도 모른다. 예전에 내가 원했던 것은 그저 나만의 작은 방이 아니었던가?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절대적인 나만의 공간 말이다. 그 바람에서 나는 얼마나 멀리 와버린 것인가. 하지만 어쩌면 앞으로도 이런 고민은 계속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