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원하는 것을 원하지 않기

시월의숲 2017. 8. 17. 00:03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흐르고, 어느덧 팔월의 중순으로 접어들었다. 지난 달에 근무지를 옮기고 나서 지금까지 내가 무얼했던가? 아무것도 생각나는 것이 없고,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 달라진 것이라곤 내가 근무해야하는 장소가 바뀌었다는 것, 매일 아침 한 시간이나 일찍 일어나 거의 50분이나 되는 거리를 출퇴근해야 한다는 것, 잠이 모자라 늘 멍한 상태의 연속이라는 것밖에는. 그동안 비가 무척이나 많이 내렸고, 더운 날들이 지나갔고(혹은 아직 지나고 있고), 요며칠은 아침 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나는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기계적으로 출퇴근을 했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심신이 지쳤으며, 지금은 그저 될대로 되는 식으로 일을 하고 있다.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오히려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는다. 앞으로 엄청나게 바쁘고 힘들 것이라는 예상은 사람을 얼마나 피폐하게 만드는가. 아직 그 시기가 도래하지 않았다는 것, 그것이 도래하기 전까지 스스로 감내해야할 무언가를 찾아야만 한다는 사실은 사람을 얼마나 무기력하게 만드는가. 그리고 사람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생각으로 삶을 살아간다지만, 자신이 내뱉은 말과 일치하지 않게 행동하는 사람들과는 어떻게 지내야만 하는 것일까.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말을 해봤자 분란만 일으킬 것이 분명하므로), 말을 하지 않았으므로 당연히 그의 말에 수긍하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납득되지 않는 내면의 저항 때문에, 나는 사람에 대한 일말의 호의를 접었고, 모든 것들이 다 될대로 되라는 식의 심정이 된 것이다. 어쩌면 사람이란 지극히 우스운 존재가 아닐까? 자가당착에 빠졌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아니라고 믿는. 스스로가 한 말을 스스로가 뒤집는 일. 그것을 타인이 했다면 겉과 속이 다르고 논리의 일관성이 없고 자신이 유리할대로만 해석한다고 비난을 퍼부었겠지만, 정작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는 나름의 합리적인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항변할 것이다. 정말 우스운 일이 아닌가? 그것이 인간이란 원래 그런 존재라고 이해하며 넘어갈 수 있는 일인가?


아, 원래는 이런 말을 하려던 것이 아니었는데. 그동안 보았던 영화에 대해서, 그림에 대해서, 어떤 장소에 대해서, 책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는데.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어쨌건 나는 영화를 보았고(일부러 더 보려고 했던 것인지 모른다), 책을 읽으려고 노력했으며, 새로운 장소나 익숙한 장소에 가면 늘 그곳에 대해서만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래야만 지금 나를 감싸고 있는 이 알 수 없는 무기력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늦은 밤에도 일부러 더 잠을 유예하기 위해 몸부림을 친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이 한없는 잠이라는 사실을 내 몸과 정신이 너무나도 명백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잠을 자지 않기를 바랐다. 오로지 나만의 시간, 아무에게도, 그 무엇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오직 나를 위해 존재하는 시간, 그 시간을 나는 간절히 원했고, 원했으므로 시간이 흘러간다는 사실이 나는 너무도 아쉬웠다. 아쉬워서 눈물까지 날 지경이다. 잠을 원하면서도 자지 않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일은 어쩌면 내 타고난 숙명일지도 모른다. 원하면서도 원하지 않는 것. 그렇게 나는 내 시간과 전투를 벌인다. 한없이 게으른 표정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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