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조용하지만 격렬한

시월의숲 2017. 9. 15. 00:22

조용하지만 격렬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아무 일 없는 듯 평온한 일상인 것 같지만, 내면에는 조금의 여유도 허용하지 않는 강박이 있습니다. 스스로를 벼랑끝으로 내몰며 어서 떨어지던지 아니면 매달려 끙끙대던지 선택하라고 다그치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렇게 하라고 말하지 않고, 그렇게 말하지 않는 이 역시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혼자 모든 일을 다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 누구도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미소지으며 혹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일이 많아서 어떡합니까, 수고가 많아요, 라며 격려의 말을 건네지만, 그 누구도 내가 늦게까지 남아 일하는 것을 선뜻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좀 더 침울해지고, 말을 하기가 더 힘들어졌습니다. 원래부터 혼자였지만, 한때 주위의 많은 사람들로 인해서 내가 혼자라는 사실을 잠시 잊고는 했는데, 이제 다시 예전으로 돌아와 혼자라는 사실을 더욱 강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거 외에는 별 일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처음의 멍한 정신으로부터 좀 나아졌다고나 할까요. 여전히 업무는 아무런 답이 없이 진행되는 느낌입니다만, 이제는 그런 느낌도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입니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은 하늘이 높고 맑은 전형적인 가을날씨였습니다. 한낮의 태양은 아직도 뜨거운 감이 있습니다만, 한여름의 태양은 이미 아닙니다. 그동안 날씨가 덥기도 하고 정신적 육제척으로 피곤하기도 해서 산책을 하지 못했습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점심을 먹은 후 늘 둔치를 따라 걸었었는데, 이제는 그것마저도 하지 않게 되니, 걷는 일이 극히 줄어서 아쉬웠습니다. 오늘은 저녁을 먹은 후 아버지와 잠깐의 산책을 했습니다. 공기가 선선하여 산책하기 딱 좋은 날씨였어요. 저녁을 먹어 배도 부르고, 바람도 시원하여 걷는 일이 무척 즐거웠습니다. 어둑어둑해지는 길을 걷다가 마침 음악분수대가 작동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음악에 맞춰 색색의 조명으로 물든 물줄기를 허공에 쏘아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보여주는 것이었는데, 나는 예전에도 그것을 몇 번 본 적이 있었어요. 하지만 이번에 다시 보니 식상하다기 보다는 오히려 새롭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건 아마 한여름의 분수와 가을로 접어드는 길목의 분수의 느낌이 달랐기 때문일 것이고, 배경음악 또한 달라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에 따라 색색으로 물든 분수의 춤을 보고 있는 그 순간이 무척 좋았습니다. 나는 살짝 미소를 지은채, 턱을 괴고 가만히 분수를 바라보았습니다. 음악이 끝나고 분수의 조명이 꺼지는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우리는 분수대를 뒤로한 채 집으로 걸어 왔어요. 무언가 차분해지는 기분이 들었지만 내면의 격렬함은 가라앉지 않은 것처럼 생각되었습니다. 음악은 조용하지만 세차게 허공으로 올라가는 분수대의 물처럼 나또한 그러한 처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하지만 이것 역시, 아무렴 어떻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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