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어떤 심정

시월의숲 2017. 12. 9. 23:52

아버지의 눈 진료 때문에 아버지와 함께 대구에 있는 안과에 다녀왔다. 거의 한 달에 한 번 진료를 받으러 가야하는데, 당뇨로 인한 합병증으로 눈이 많이 나빠졌기 때문이다. 진료를 보는 시간은 고작 10분 정도 밖에 되지 않았지만 차를 타고 왔다갔다 하는 시간이 더 많이 걸렸다. 짧은 진료가 끝나고 약국에 가서 약을 구입한 뒤, 집으로 출발했다. 바로 집으로 올까 하다가 어차피 하루를 아버지 병원을 다녀가는데 써야했기 때문에, 오는 길에 아무 관광지나 들러서 보고 가자고 의견을 모았다. 그래서 간 곳이 군위의 인각사라는 곳이었다. 처음 그곳에 가고자 했던 이유는 집으로 가는 방향에 있는 곳이기도 했거니와, 고요하지만 충만한 겨울 정취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는데, 막상 가보니 오히려 마음이 더욱 쓸쓸해지고 급기야는 황량해지고 말았다. 그곳은 일연 스님이 기거하면서 삼국유사를 완성한 곳이라고 소개되어 있었지만, 역사책에 등장하는 그 유명한 스님의 이름과 책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채 파헤쳐지고 널부러진, 무방비로 방치된 채 잊혀져가는 장소처럼 보였다. 문득 오래전에 읽은 제발트의 <토성의 고리>가 생각났는데, 책 속의 화자처럼 일부러 폐허를 찾아다니는 것도, 여행의 휴유증으로 병원에 입원할 정도도 아니었지만, 나는 그곳에서 그 비슷한 것을 보았고, 그 비슷한 심정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그 절(이라고 하기에도 망설여지는) 옆으로 조그마한 강이 흐르고, 그 뒤편으로 석벽으로 이루어진 산이 있었다. 그 절의 영향 때문인지, 그 산 또한 수려함과는 거리가 먼, 조금은 옹색하고 초라한 분위기를 풍겼다. 하지만 그 산이 아니었다면 절은 더욱 초라하고, 쓸쓸했을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산과 절이 그 장소의 황량함을 배가시키는 것인가? 나는 판단할 수 없었다.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떤 말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나는 그곳에서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옛 기억의 잔해 혹은 파편들처럼 조금은 혼란스러웠고, 쓸쓸했으며, 황량했다. 나는 그곳에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흐트러진 마음을 추스리지도 못한채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토성의 고리> 속 화자의 심정이(그것은 고통이었을까) 이와 비슷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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