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알 수 없는 기억

시월의숲 2018. 1. 28. 22:26

기억을 소환시키는 장소가 있다. 그 장소만 가면 어린 시절의 내가 떠오르면서 금세 아련한 기분이 되고 만다. 내게 그 장소란 어떤 길, 혹은 골목이다. 그 근처에만 가도 내 발걸음은 어느새 그 길로 가 있다. 그 길이 나를 부르는 것인지, 내가 그 길을 가고자 한 것인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이상한 건, 기억을 소환시킨다고는 했지만, 어떤 특정 기억이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나는 그 길에 대한 추억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단순히 어린 시절부터 그 길을 걸었다는 기억 외에는. 나는 늘 그것이 의문이었다. 왜 그 길에 얽힌 아무런 추억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그 골목으로 접어들면 추억에 젖어들듯 아련해지는 것일까. 왜 어린 시절의 기억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것만 같은가. 마치 어린 시절 골목에 얽힌 사연이라도 있는 것처럼.


살을 에는 추위 때문에 한동안 못나갔던 산책을 나간 오늘도 마찬가지로 그 길을 걸었다. 내 몸이 그 길로 향했다. 길은 평범하다. 길 가에는 낡은 건물과 새로 지은 건물들이 들어서 있고, 건물 안에는 가로수처럼 키 큰 나무들이 들어서 있다. 나무는 잎사귀가 무척 크고 굵은 열매가 달려서 가을이면 바닥에 시커먼 신문처럼 커다란 잎사귀들과 열매가 나뒹굴고는 했다. 그게 무슨 나무인지는 아직도 알지 못한다. 그 골목의 특이한 점이라고는 커다란 잎을 가진 나무 아래로 담장이 길게 뻗어 있었는데, 담장 윗부분에는 철조망이 담장 길이의 한 오분의 일 가량 세워져 있다는 것이었다. 사람의 얼굴만한 크기의 잎과 굵은 열매를 가진 나무와 철조망으로 이루어진 높은 담장. 내가 그 길을 걸으며 느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라는 것이 어쩌면 그 나무와 철조망에서 받은 깊은 인상 때문에 형성된 것일까? 오늘 그 담장과 나무를 바라보며 내가 느낀 감정의 정체를 가늠해보고자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겨울이라 잎은 다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아 있었지만, 여전히 '기억'(이라고 믿게 만드는)을 소환시키는 그 길, 골목, 담장과 나무 때문에 나는 마법에 빠진 듯 아련한 기분에 휩싸인채 걷고 있었으므로.


집으로 돌아와 배수아의 소설을 읽는데 이런 구절이 나왔다. 나는 전에 그 소설이 잡지에 게재되었을 때 읽은 기억이 있으나, 단행본으로 나온 소설집을 읽다가 다시 그 부분을 읽게 되었고, 오늘의 산책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고, 어린시절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일까. 나는 꿈을 꾸고 있는가.


어린 시절은 망상이에요. 자신이 어린 시절을 가졌다는 믿음은 망상이에요. 우리는 이미 성인인 채로 언제나 바로 조금 전에 태어나 지금 이 순간을 살 뿐이니까요. 그러므로 모든 기억은 망상이에요. 모든 미래도 망상이 될 거예요. 어린아이들은 모두 우리의 망상 속에서 누런 개처럼 돌아다니는 유령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