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아주 가끔씩, 안부 전화만으로도 나는 충분해요, 더이상은 바라지도 않습니다

시월의숲 2018. 2. 10. 23:21

내가 가족에게서 느끼는 이 양가적인 감정은 무엇일까. 왜 나는 가족들에게서 '나를 지탱하는 힘'과 '더이상 말하고 싶지도, 보고 싶지도 않은 무거운' 감정을 느끼는가. 왜 나는 그들을 필요로 하면서도 원하지 않는가. 그것은 사랑하면서도 사랑하지 않는 것과 같고, 원하면서도 원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이 모순적인 감정은 무엇일까. 내게 가족은, 어느 누구를 떠나서 모두 어떤 '무거움'을 느끼게 하는 존재들이다. 그들의 안부 전화는 반가움의 감정보다는 짧은 한숨과 함께 어떤 각오를 하고 받아야 하는,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끼게 한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들 모두가 내게 무엇을 바라지도 않고 나또한 그들에게 무언가를 바라지 않는데. 혹 그들 중 누군가는 내게 바라는 것이 있을 수 있다. 아니, 마치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 바라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가족들은 내게 무언가를 바라지 않고, 나도 그들에게 그 어떤 것도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나를 위한다는 생각으로 아낌없이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들은 내게 내 삶을 찾으라고 말한다. 나 자신을 위해 살라고 말한다. 가족으로부터 벗어나서 오로지 나만을 생각하며 살라고 말한다. 그들은 말한다. 그렇게 말만 한다. 그리고는 다른 가족에게 나를 위한답시고 충고하기를 서슴치 않는다. 하지만 왜 그래야 하는가? 나는 내 삶이 있고, 그 누구보다 나 자신을 위해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들의 충고는 내게 아무런 소용이 없고, 오히려 의아하게 느껴진다. 내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그들이게는 있는가? 나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나를 불쌍하게 여기는 것이 아닌가. 그들이 하는 말, 그들이 보내는 눈빛들은 그저 외부자의 시선으로 그들 자신의 생각만으로 나를 틀에 넣어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단지 내 과거의 삶의 일면만을 본 채,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내 삶과 나를 모조리 다 아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그저 내게 보내는 동정이나 연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부랑자들과 거지들, 결손 가정의 아이들, 억압과 구타로 신음하는 아이들에게 보내는, 그저그런 동정이 아닌가 말이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나를 위한답시고 하는 모든 말들이 그저 말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물질적인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말에는 내가 이해하지 못할, 선뜻 받아들이지 못할 어떤 진실성 혹은 관심이 빠져 있다. 그들이 언제부터 나를 그렇게 생각했다는 말인가? 내가 빚을 내서 집을 산 것이, 나를 위해서 산 것이지 내가 힘들기 위해서 산 것은 아니지 않는가? 내가 나를 위해 산 집을 가지고도, 그렇게 힘들게 뭐하러 집을 샀느냐, 한 달에 이자가 얼마인데 그것을 갚으려면 얼마나 오래 갚아야 하는데, 왜 그렇게 쪼들려가면서, 좀 여유롭게 쓰지 못하고 사느냐고 말할 자격이 그들에게는 있는가? 그 무엇하나 도움을 주지도 않으면서 그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나로서는 좀 의아했다. 내가 내 집을 산 것을 두고 왜 그렇게 말들이 많은 것인지. 그것이 나를 진정 위하는 말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나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다. 나는 그저 그들과 아무 탈없이 지내고 싶은 마음 뿐이다. 물론 되도록이면 그들과 만나지 않기를 바라지만. 서로 모른채 살아가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저 아주 가끔씩, 그것도 생각이 날 때만 안부 전화 한 통화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서로 만나지 않으면 길게 말할 일도 없고, 길게 말할 일이 없으면 서로 얼굴 붉힐 일도 없다. 왜 굳이 만나서 서로 부담스러운 채로 하고 싶은 말은 저 밑으로 꽁꽁 숨긴 채, 연기자의 얼굴표정으로 서로 밥을 먹고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것만큼 불필요하고, 쓸데없고, 비생산적인 일이 어디 있을까! 생각만해도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러니 제발, 나를 위한답시고 아무 말이나 하지 말기를. 그것이 오히려 어색하고 이상한 일이란 걸 이제는 좀 알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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