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하루를 살고, 그 하루를 잊어버리고

시월의숲 2018. 2. 19. 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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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없이 바쁜데도 불구하고 무엇 때문에 정신이 없는지 알 수 없다. 수많은 생각들이 떠올랐다가 가라앉는다. 서류는 쌓여가고 해야 할 일이 적힌 메모지는 이미 어디 놓아두었는지 잊었다. 수첩에 적힌 메모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한다. 어떤 암호 혹은 낙서인가?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 일,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의 어려움에 대해서 생각한다. 특히 남자들의 세계에서 보여지는 그 알 수 없는 경쟁에 대해서. 나로써는 전혀 쓸데없이 보이는 알력 싸움이 우습기만 한데도. 왜 어떤 사람들은 특정한 방식으로 대해야만 말이 통하는 것인지 의아하다. 그냥 보통의 말로, 화내거나 윽박지르거나 강압적이거나 힐난하거나 권위에 깃대어 말하지 않고서는 대화가 되지 않는 것인가? 오늘은 그런 사람들 틈에 섞여 하루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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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부터 체기가 있어서 가슴이 답답하고 몸에 힘이 없고 열이 조금 났다. 오늘도 완전히 낫지 않은 몸으로 출근을 해서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으니 어쩐지 나 자신이 무척이나 처량하게 느껴졌다. 몸이 아프니 마음도 아픈 것 같고, 피곤도 더 빨리 몰려와서 오후가 되니 벌써 지쳐버렸다. 직원들은 모두 퇴근하고 나홀로 사무실에 남아 컴퓨터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오히려 정신이 멍해져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더 일을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정리하고 집으로 왔다. 하루가, 일주일이, 한 달이 어떻게 지나간 줄도 모르게 지나가고 있다. 벌써 설연휴가 지나갔고, 설에 내가 무얼 했는지 벌써 잊어버렸고, 오늘 하루 내가 한 일도 모두 잊었다. 하루하루를 잊고 지나가는 느낌이다. 그저 하루를 살고, 그 하루를 잊어버리고, 또 하루를 살고, 그 하루를 잊어버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내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일주일 뒤의 내가, 한 달 뒤의 내가, 일 년 뒤의 내가, 지금 이 순간을, 이 시간을, 이 계절을, 이 공간을 어떻게 기억할까. 그 때의 나는 지금의 나와 많이 다를까, 조금의 변화도 없이 그저 늙어가기만 할까. 두렵지만, 이 두려움 또한 나는 잊을 것이다. 나는 기억나지 않을 기억 속을 살고 있다. 그런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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