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당신의 안부

시월의숲 2018. 5. 13. 22:39

어제 밤새 비가 왔습니다. 아니, 밤새도록 왔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어요. 밤새도록 깨어 있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새벽까지 비가 왔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어젯밤 비가 지붕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며 늦게까지 책을 읽었으니까요. 원래 베개에 머리만 대면 자는 나이지만 어쩐지 어제는 늦게까지 잠이 오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인터넷도 하다가 책도 읽으며 시간을 보냈던 것입니다.


어제 늦게 잠이 들어서인지 오늘 아침엔 늦잠을 잤습니다. 모처럼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은 온전한 잠이었지만, 꿈 때문에 그리 유쾌한 잠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내용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꿈에서 무언가 답답하고 억압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깨고 난 후에도 한동안 잔해처럼 남아 있었습니다. 좀 더 자고 싶었지만 창밖의 햇살이 무척이나 환해서 몸을 일으켜 커튼을 걷고 밖을 내다보았습니다. 어젯밤의 비는 온데간데 없고 찬란한 오월의 햇살이 온 세상을 비추고 있었어요.


아침식사로 간단한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고 읽다 만 책을 다시 펼쳤습니다. 요즘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기사단장 죽이기>를 읽고 있어요. 두 권으로 된 제법 두툼한 책이지만 하루키 소설이 그렇듯 흡인력 있게 잘 읽힙니다. 읽는 맛도 있지만 뒤에 무슨 내용이 나올까 궁금해져서 요즘은 틈만나면 읽고 있습니다. 어딘가 예전의 하루키 소설에 비해서 달라진 것도 같지만, 딱히 무엇이 달라졌는지 말하기는 뭣한 그런 소설입니다. 결말이 무척 궁금해지는 소설이기도 합니다.


햇살이 너무 좋아서, 오후에는 오랜만에 산책을 나갔습니다. 얼마만의 산책인가! 나는 익숙한 길을 걸으며 무엇이 나를 이 산책에서 멀어지게 했을까 생각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나올 수 있는 길인데 말입니다. 길은 여전하지만, 길의 풍경은 시시각각 모습을 바꿉니다. 오늘은 아카시아향기 가득한 산책로를, 역시 아카시아 꽃이 눈처럼 떨어져 쌓인 길을, 오월의 햇살과 부는 바람과 함께 걸었습니다. 그리고 길을 따라 세워져 있는 나무판에 적힌 시를 천천히 읽었습니다.


시를 읽으며 산책을 하고 있자니, 내가 걷는 이 산책로를 일명 시인의 길 혹은 문학의 숲이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천천히, 주위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오월의 햇살을 받으면서, 바람에 실려오는 아카시아 향기를 맡으면서 걸었습니다. 일상이라는 괴물이 나를 힘들게 할지라도 가끔 이렇게 자연 속에서 자연을 느끼며 걷는다면 또다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나는 무엇 때문에 그리 심각한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한숨을 쉬는가? 무엇이 나를 힘들게 하는가? 그런 물음들이 산책을 하는 동안에는 전혀 생각나지 않았으니.


당신은 어떤가요.

나는 당신의 안부가 무척이나 궁금합니다.

당신의 오월과 당신의 햇살, 당신의 아카시아와 당신의 바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