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어떤 기대

시월의숲 2018. 8. 14. 22:58

어쩌다보니 이사를 했다. 물론 내 귀차니즘 때문에 이사과정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지만, 어쨌건 조금씩 물건을 옮기고나서 드디어 새 아파트에서 생활을 하게 되었다. 혼자 사는 삶이라 최소한의 것만을 가진채 살려고 하지만, 이사를 할 때마다 느끼는 건, 정말 내가 쓸데없는 것을 많이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무엇 하나 과감하게 버리지 못하고 또 꾸역꾸역 집어 와 언제 사용하게 될지는 모르지만 언젠가는 사용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물건을 집어 넣고 있다. 이 고질병은 어째 잘 고쳐지지 않는다. 몇 년간 사용하지 않는 것은 앞으로도 사용할 일이 없을텐데. 오래 입지 않은 옷을 다시 입을 일이 잘 없듯이. 아버지는 선반 위에 물건이 있는 것을 잘 보지 못하고, 불필요하다 생각되는 것들은 과감하게 버리곤 하는데, 나는 그런 아버지의 성격을 닮지는 않았나보다. 어쩌면 할아버지의 성격을 닮은 것인지도 모른다. 할아버지는 연필 하나, 종이 하나 버리는 것도 아까워했으니. 내가 그런 할아버지를 보고 화가 났듯이 아버지가 나를 보고 화를 내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리라. 누가 그랬던가.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물건을 집안에 가지고 있으면 안좋은 기운이 나온다고. 그래, 버릴 건 버려야겠지. 하지만 나는 오래전에 사용했던 물건들(지금은 사용하지 않는)을 보면 마치 과거의 내 모습, 내가 가진 추억을 떠올리게 해서 차마 버릴 수가 없다. 그것이 마치 과거의 나를 드러내고 있는 것만 같아서. 과거에 내가 어떠했고, 어떤 생각을 했으며, 어떤 마음을 가졌었는지 그 물건이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아서. 그게 아니라면 내가 무엇인지, 내가 어떤 존재인지, 나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하는, 아무 소용없는 생각 때문에 말이다. 내가 너무 감상적인지도 모른다. 오래되어 곰팡이 냄새를 풍기는 그런 것들은 그저 쓰레기에 불과할지도 모르는데. 그런 것들이 아니라도 나는 나일 뿐인데.


이사할 때마다 느끼는 이런 기분을 이번에도 느끼면서(이번에는 정말 쓸데없는 것들을 모조리 버리리라 다짐하면서) 새 집에서 생활한 지 이틀이 지났다. 조금씩, 생각날 때마다 하나씩, 느릿느릿 짐을 정리하고 있다. 아파트 생활은 처음이라 잘 적응할 수 있을까 걱정도 되지만 그건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아직까지 이곳은 밤에 조용하고, 엘리베이터에도 사람을 마주치는 경우는 드물다. 가만히 있으면 풀벌레 소리도 들린다. 다만 주위가 모두 아파트로 둘러싸여 있어 커튼을 걷은채로 창문을 활짝 열고 생활하기가 좀 꺼려지는데, 아마 이것도 나만의 쓸데없는 걱정일 것이다.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을테니까. 이곳에서 나는 또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혼자 있는 아버지가 좀 걱정이 되지만, 집도 가까우니 내가 자주 들여다보면 될 것이다. 물론 아버지는 당신을 측은하게 생각해서 일부러 오지는 말라고 하시지만, 어찌 그럴 수 있나. 그 누구도 아닌, 내 아버지인데. 생각지도 않은(어쩌면 불필요하게) 큰 집에 살게 되어 얼떨떨하기도 하고, 기분 좋기도 하다. 내가 이 아파트에 들어오기까지 했던 수많은 고민들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의 생활이 조금 기대가 되는 것은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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