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첫눈, 뮤지컬, 서울 그리고 사람들

시월의숲 2018. 11. 25.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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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첫눈이 왔다. 이번 일기예보는 어쩜 그리 잘 맞는지. 첫눈이 오는 날, 나는 서울에 뮤지컬을 보러 갔다. <엘리자벳>이라는 오스트리아 황후의 이야기였는데, 벌써 몇 년 전에 나는 옥주현이 부른 <나는 나만의 것>이라는 영상을 상당히 인상깊게 본 적이 있어서 기대를 하고 공연장을 찾아갔다. 이번 공연은 옥주현이 아니라 김소현 캐스팅으로 보았는데, 김소현의 실제 남편인 손준호와 같이 극 중에서도 부부 역할을 맡았고, '죽음' 역할은 아이돌 그룹 빅스의 보컬인 레오였으며, 루케니 역은 강홍석이었다. 전체적으로 캐스팅은 좋았지만, 그 중에서도 루케니 역의 강홍석의 연기가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다. 엘리자벳 역의 김소현은 잘하긴 했지만, 예의 그 성악 발성이 가사 전달을 방해하는 것처럼 보였고, 죽음 역할의 레오는 어딘가 모르게 설익은 모습이 보여서 좀 아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 본 엘리자벳은 화려한 의상과 무대세트가 시선을 사로잡았고, 몇몇 음악은 무척 아름다웠다. <나는 나만의 것>이라는 노래만으로 충분히 이 뮤지컬은 볼 가치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풍성한 볼거리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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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을 보고 강남역 신세계 백화점에 있는 서점을 구경했다. 뮤지컬을 공연했던 블루 스퀘어에 있는 인터파크는 그 규모가 생각보다 작았는데, 신세계 백화점에 있는 반디앤루니스는 그보다는 훨씬 컸다. 주로 인터넷으로 책을 사는 나로서는 서점에 가 본적이 참 오랜만이었다. 서점 안에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고, 벤치에 앉아서 책을 읽는 사람들도 많았다. 나는 천천히 서점을 둘러보면서 내가 사고 싶었던 책이 무엇었는지 생각했다. 하지만 검색대에서 검색을 해보아도 내가 사려고 한 책들은 하나같이 제고가 없었다. 심지어 11월달에 나온 신간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하긴 이렇게 큰 서점이라도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 책들은 가져다 놓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아쉬움을 접어 둔채 그곳에 있는 책 중에 내가 읽고 싶은 책을 고르기 시작했고, 마침 한강의 신작 소설이 실려 있는 책을 발견했다. 제12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이었는데, 이번에 한강의 <작별>이라는 단편이 수상작으로 실려 있었다. 벤치에 앉아 깜빡 잠들었다가 깨어났는데 눈사람이 되어 버린 여자의 이야기라니. 나는 망설임없이 그 책을 집어 들고 계산을 하고 서점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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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간 서울은 여전히(당연하게도) 사람이 많았으며, 횡단보도를 지나다가 물밀듯이 쏟아져 오는 사람들에 어깨를 부딪혔을 때는 살짝 어지럼증을 느끼기도 했다. 지하철 속 사람들은 하나같이 핸드폰에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나는 떠밀리듯 지하철에 올라타다가 가방이 문에 낄 뻔 했다. 지하철의 공기는 탁하고 답답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타고 내리는 곳이니 그럴법도 할 것이다. 지하철을 타면 나는 항상 서울에 대해서 생각한다. 서울은 내게 화려한 공연의 도시이자, 우울한 잿빛의 도시이고, 표정없는 사람들의 도시이다. 살짝 어지럼증을 동반하게 하는.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는 서울이라는 도시에서의 삶은 과연 어떨지 나는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그렇게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도시를,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가는 내가 걷고 있다는 사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그런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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