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절실함에 대하여

시월의숲 2018. 11. 30.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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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인간은 결핍되어야만 무언가 절실해지고, 절실해질 때만이 무언가를 이룰 수 있다고. 그것이 어떤 형태로든, 불완전하면 불완전한 채로, 이상하면 이상한 채로 말이다. 거창하게 말하긴 했지만 사실 간단한 것이다. 나는 작년 말과 올해 초 극도로 스트레스 받는 일을 맡아 하면서 내가 이렇게 일만 하다가 죽는 것은 아닐까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있다. 아침 일찍 출근해서 저녁 늦게 퇴근을 하면서 혼자 있는 시간이 줄어들고, 일 외에 다른 생각을 할 시간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극도의 두려움이 있었다. 그러다 누군가 기타를 함께 배워보지 않겠냐고 제안했고, 나는 시간이 도저히 날 것 같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후 나는 무엇에 홀리듯 기타를 구입했고, 일주일에 한 번 기타모임에 가게 되어 지금껏 참석하고 있다. 하지만 이상하지. 처음에 내가 통기타를 배우고자 했던 것은 통기타에 흥미가 있어서도, 기타 연주를 좋아하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때 나는 그저 일 외에 다른 것을 하고 싶었고, 마침 내가 할 기회가 온 것이 기타였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기타 모임이 마음에 들었다. 그때 만큼은 정말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기타에만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잘 알지도 못하는 기타의 음계를 익히고, 코드를 익히고, 스트록을 연습하고, 반주에 맞춰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때는 절실한 무언가가 내게 있었다. 그것이 아마도 기타모임에 가게 하고, 기타를 연습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당시 휘몰아치던 일에서 조금 놓여나자 오히려 기타를 치는 것이 시들해졌다. 그때보다 더 여유가 생기고, 스트레스도 덜 받는데도 불구하고 기타 연습을 더 안하게 되고, 심지어 기타모임에 나가는 것이 조금씩 귀찮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건 무얼 의미하는가? 내게 있었던 어떤 결핍이 어느정도 충족되었기 때문인가? 절실함이 사라졌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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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전에 텔레비전의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출연자들이 영국의 요크셔 지방을 여행하는 장면이 나왔다. 출연자들은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을 언급하면서 영미 문학의 성지가 된 요크셔 지방의 마을 하워스를 둘러보았다. 나도 오래전에 읽었던 소설 <폭풍의 언덕>을 떠올리며 그들의 여정을 따라갔다. 하워스는 소설의 배경이 되는 지방이었는데, 소설 속에서 느꼈던 것처럼 황량하고 바람이 많이 부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태어나 자란 세 자매가 모두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다니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들도 어떤 결핍을 느꼈던 것일까? 그것이 그들에게 절실함을 불러일으키고, 그 절실함으로 그들은 그렇게 놀라운 작품들을 탄생시킬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온통 회색빛의 우중충하고 세찬 바람이 부는 황야에서 말이다. 그런 황량함을 온몸으로 느끼며 살지 않았다면 <제인 에어>나 <폭풍의 언덕> 같은 작품들은 아마 태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보면 인간이란 극한에 몰렸을 때 무언가 이룰 수 있다는 말은 어쩌면 진실일지도 모르겠다. 이룬다는 말이 너무 낙천적이라면, 탄생시킨다 혹은 변화시킨다고 하면 어떨까(너무 거창한가?). 그게 무엇이든, 그것이 어떤 형태로든, 불완전하면 불완전한 채로, 이상하면 이상한 채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