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한겨레출판, 2018.

시월의숲 2019. 2. 26. 23:30

인간에게 특정한 결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바로 결함이라는 것. 그러므로 인간이 배울 만한 가장 소중한 것과 인간이 배우기 가장 어려운 것은 정확히 같다. 그것은 바로 타인의 슬픔이다.(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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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이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으려면 그 작품이 그 누군가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담고 있어야 한다는 것. 위로는 단지 뜨거운 인간애와 따뜻한 제스처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나를 위로할 수는 없다. 더 과감히 말하면, 위로받는다는 것은 이해받는다는 것이고, 이해란 곧 정확한 인식과 다른 것이 아니므로, 위로란 곧 인식이며 인식이 곧 위로다. 정확히 인식한 책만 정확히 위로할 수 있다.(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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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와 고통의 양을 저울 위에 올려놓는 일이 비정한 일인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비정한 일은, 네가 아픈 만큼 나도 아프다고, 그러니 누가 더 아프고 덜 아픈가를 따지지 말자고 말하는 일일 것이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실제로 덜 아픈 사람이다. 지배하는 사랑과 미성숙한 사랑의 공통점 중 하나는 저울을 사용할 줄 모르거나 사용하지 않으려 하는 데 있다.(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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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진실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채 규정되는 모든 존재들은 억울하다. 이 억울함이 벌써 폭력의 결과다. '폭력'의 외연은 가급적 넓히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이런 정의를 시도해본다. '폭력이란? 어떤 사람/사건의 진실에 최대한 섬세해지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데서 만족을 얻는 모든 태도.' 단편적인 정보로 즉각적인 판단을 내리면서 즐거워하는 이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고 나는 느낀다. 어떤 인터넷 뉴스의 댓글에, 트위터에, 각종 소문 속에 그들은 있다. 문학이 귀한 것은 가장 끝까지 듣고 가장 나중에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문학은 4·35·18의 반복을 겨우 저지한다. 제주에서 광주로 돌아오는 길 위에서, 그것은 나의 확신이라기보다는 다짐이었다.(9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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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소설의 언어는 두 기능, 즉 기능성과 예술성 사이에서 진동할 수밖에 없다. 소설은 이야기의 집이므로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해야 하고(기능성), 언어로 만드는 예술품이므로 이야기 없이도 존립할 수 있어야 한다(예술성). 그러니까 소설의 언어는 수단이면서도 동시에 목적이다. 이 역설을 견뎌내는 것이 관건이다.(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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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무엇에서건 배운다. 그러니 문학을 통해서도 배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게서 가장 결정적으로 배우고, 자신의 실패와 오류와 과오로부터 가장 처절하게 배운다. 그때 우리는 겨우 변한다. 인간은 직접 체험을 통해서만 가까스로 바뀌는 존재이므로 나를 진정으로 바꾸는 것은 내가 이미 행한 시행착오들뿐이다. 간접 체험으로서의 문학은 다만 나의 실패와 오류와 과오가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를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피 흘릴 필요가 없는 배움은, 이 배움 덕분에 내가 달라졌다고 믿게 할 뿐, 나를 실제로 바꾸지 못한다. 안타깝게도 아무리 읽고 써도 피는 흐르지 않는다.(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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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대 이후 한국 사회는 어쩌면 새로운 계몽의 시대로 접어든 것처럼 보이는데, 이 계몽의 물결은 앞서 인용한 칸트의 저 문장에서 '지성'의 자리에 '감수성'을 넣을 것을 요청한다. 오늘날 '미성숙한'(, 계몽되지 못한) 인간이라 불리는 이들이 결여하고 있는 것은 지성이 아니라 감수성이기 때문이다. 성숙한(계몽된) 인간이 갖고 있는 감수성이란, '젠더 감수성'이나 '인권 감수성'이라는 개념에서 그 용례를 찾아볼 수 있는 것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들을 이해하고 행여 그것에 대한 잘못된 지식/믿음('무지''미신')'차별'의 근거로 작동할 수 있는 상황을 예방하거나 비판할 줄 아는 민감함을 의미한다. 이런 감수성은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것이 아니다. 나에게 그것이 없다는 것은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와 고통을 줄 수 있는 가능성을 상시적으로 품고 있다는 뜻이다.(188~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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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을 존경하는가 하고 묻는다면 '깊이 있는 사람'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내게는 한 인간의 깊이 역시 인간 이해의 깊이다. 인간의 무엇을 깊이 이해한다는 것인가. 나는 '타인의 고통'이라는 평범한 답을 말할 것이다. 물론 이 대답 역시 진부하게 들린다. 그러나 고통받는 사람들의 고통은 진부해지기는커녕 날마다 새롭다. 세상에 진부한 고통이란 없으니 저 대답도 진부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투표할 것이다. 깊은 사람에게, 즉 타인의 고통을 자기 고통처럼 느끼는 사람에게 말이다.(20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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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그토록 대단한가. 그렇다면 시는, 있으면 좋은 것인가 없으면 안 되는 것인가. 소설과 영화와 음악이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있다면 시 역시 그렇다. 그러나 언어는 문학의 매체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삶 자체의 매체다. 언어가 눈에 띄게 거칠어지거나 진부해지면 삶은 눈에 잘 안 띄게 그와 비슷해진다.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마음들이 계속 시를 쓰고 읽는다. 시가 없으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해도, 시가 없으면 안 된다고 믿는 바로 그 마음은 없으면 안 된다.(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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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고독이 밀려왔다'라는 표현을 흔히 사용하지만, 고독은 어쩌다가 밀려오는 것이 아니라 늘 그 자리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고독이 가끔 밀려오는 것이 아니고, 고독하지 않다는 착각의 시간들이 가끔 밀려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텅 빈 (사실은 고독으로 가득 찬) 푸른 방에 제아무리 살림살이를 들여놔도 그 방의 빈틈을 완전히 채울 수는 없으리라. 사랑에는 증오라는 반대말이 있지만 고독에는 그 정도로 명확한 반대말이 없다. 공기처럼 늘 확실히 존재하는 어떤 것에는 반대말이 있을 수 없다는 뜻일까.(291~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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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제 몫의 결여를 갖고 있는 것이 인간이고, 또 그런 인간이 홀로 살아가기에는 너무도 버거운 것이 바로 인생이라는 사실을 언젠가부터 저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사랑이란 궁극적으로 우리가 서로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대체로 이기적인 우리가 다음과 같은 놀라운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사랑 속에 있을 때입니다. '나는 사랑한다, 내가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너를 살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너를 살게 함으로써 나 역시 살 가치가 있게 되기 위해서.'신이 있다면 그가 우리를 사랑하겠지만, 신이 없다면 우리가 서로를 사랑해야만 한다는 것, 이것이 인간의 연악함이자 위대함이라는 것. 그러므로 사랑에 관한 한, 언제나 이렇게 말할 수밖에요. 곁에 있어줄게, 우리가 온전해지기 위해서.(34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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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비판은 적의 가장 복잡하고 심오한 부분과 맞서는 일이다. 그럴 때 나의 비판 또한 가장 복잡하고 심오한 수준에 이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니체의 말대로 적을 대하는 태도는 나 자신을 대하는 태도와 연결돼 있다. 적을 사랑한다는 것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적을 사랑하면서 고귀해질 것인가, 적을 조롱하면서 공허해질 것인가. 수많은 매체가 생겨나고, 수많은 비판들이 쏟아진다. 좋은 비판과 나쁜 비판이 있다. 전자는 어려워서 드물고 후자는 쉬워서 흔하다.(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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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과 같은 생각을 오랫동안 해왔다. '문학은 단순한 것을 복잡하게 만드는 일이다. 아니, 단순한 것이 실은 복잡한 것임을 끈질기게 지켜보는 일이다. 진실은 단순한 것이라는 말이 있지만, 진실은 복잡한 것이라는 말도 맞다.' 세상은 점점 빨라지고 있고, 글과 말은 점점 섞이고 있다. 빠른 속도로 깊게 생각하는 법을 나는 모른다. 요즘 나는 어쩌면 이제 이 세계 자체가 문학에 적대적인 곳으로 바뀐 것이 아닌가 하는 비관적인 생각과 싸우고 있다.(387~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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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작품은 사람과 비슷하다. 첫인상이 전부는 아니라는 점에서 말이다. 더 심각하고 진지하게 말하자면, 한 번 보고는 아무것도 제대로 알 수 없다는 점에서 말이다. 이것은 평론가로서 내가 갖고 있는 '직업윤리'이지만, 창작자들에게 기대하는 '직업 윤리'이기도 하다. 게으르게 만들어진 영화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인간을 납작하게 그린다는 것이다. 어떤 영화에 한 번 보면 다 알겠는 평면적 캐릭터가 나온다는 것은 그 영화를 만든 사람이 타인이란 한 번 보면 대충 다 파악할 수 있는 존재들이라고 믿고 있다는 뜻이다. 언젠가 쓴 적이 있지만, 인간의 내면이 얼마나 복잡한 것이며 타인의 진실이란 얼마나 섬세한 것인지를 편리하게 망각한 채로 행하는 모든 일은 그 자체로 '폭력'이다. 창작이 폭력이 되어서는 안 된다.(390~3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