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호랑이를 보았다

시월의숲 2019. 2. 12. 23:29




"지금 가시면 호랑이 퇴근하는 거 보실 수 있을 거예요."


늦은 점심을 먹고 여유롭게 둘러보고자 간 수목원에서 매표소 직원이 말했다. 우리는 그 말을 듣고 퇴근하기 전 호랑이를 보기 위해 서둘러 갔지만, 호랑이의 퇴근은 실로 자유로워서, 호랑이가 제 발로 건물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직원들이 차에서 지켜보는 것이 다였다. 어쩌면 훈련이 된 것도 같았는데, 퇴근시간이 다가와 조련사가 모는 차가 자신들 곁으로 다가오는 것 같으면 천천히 일어나 주위를 몇 번 어슬렁거리다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호랑이가 퇴근하려고 어슬렁거리는 모습만을 보았을 뿐, 정작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까지 보지는 못했다. 이미 관람시간이 끝나가고 있어서 직원들이 내려가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생각보다 오래 호랑이를 볼 수 있었다. 오히려 낮에 갔으면 누워있는 호랑이의 뒷모습만 보고 왔을 거라고, 직원인 듯 보이는 사람이 말했다. 호랑이는 야행성이기 때문에 한낮에는 활동을 거의 하지 않고 누워만 있는데, 아침에 숲에 풀어놓았을 때와 오후 늦게 퇴근할 때 가장 많이 움직인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우리는 하염없이 호랑이를 바라보았다. 처음으로 본 그 맹수는 그냥 커다란 고양이 같다가도, 신비롭고 위험한 존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잊지 않기 위해 조금은 필사적인 마음이 되어 호랑이 두 마리를 바라보았다. 나와는 다르지만 지금 내 앞에, 나와 같은 공간에 있는 그 존재를. 내가 호랑이를 보고 있다는 사실이 어쩐지 믿기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어쩔 수 없이, 자연 친화적이라고는 하지만 '조금 큰 동물원'일 뿐인 그 공간과, 그 속에 갇혀 있는 동물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인간이라는 동물에 대해서도. 지금 호랑이를 바라보고 있는, 철조망 '이쪽'에 존재하는 나라는 인간을 포함해서.



- 2019. 2. 6.(수) 설연휴 마지막날, 백두대간수목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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