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양동마을에서

시월의숲 2019. 1. 20. 21:56









경주의 주상절리와 양동마을은 어쩔 수 없이 제주도의 주상절리와 안동의 하회마을을 떠올리게 했으나, 그것은 그곳을 가보기 전의 생각이었다. 실제로 가 본 경주의 주상절리와 양동마을은 경주만의 주상절리와 양동마을이었다. 그 자체로 너무나 충분하여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특히 양동마을에 간 날은 흐리고 비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노란 볏단을 지붕에 인 초가집들이 불을 켠 듯 환하여 흐릿했던 시야가 탁, 하고 밝아진 느낌이었다. 아버지는 그 모습을 보고 오래 전에 보았던 시골마을의 풍경이 생각나 정겹다고 말했다. 나는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시골의 초가집이 이상스레 그리워졌다. 양동마을은 설명할 길 없는 그리움을 느끼게 하는 마을이었다. 그곳의 나무들은 하나 같이 오래되었고, 하늘을 향해 촘촘한 가지들을 뻗고 있었다. 마을만큼 오래되었거나 최초의 마을보다 더 오래되었을 나무들. 나는 서백당의 육백 년이 넘었다고 하는 향나무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육백 년이라는 세월이 그 나무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을터였다. 나는 나무를 한 번 쓰다듬고 서백당을 나왔다. 마침 저 멀리 물가에 커다란 날개를 가진 새가 날아 올랐다.


생각보다 마을이 커서 제대로 돌아보려면 최소한 반나절은 걸릴 듯 싶었다. 가족들과 함께 갔는데, 어린 조카들도 있고, 비도 오고 마침 배가 고프기도 해서 그만 둘러보고 점심을 먹기로 했다. 양동마을 근처 맛집을 검색하는 중에 동생이 연잎밥이 어떻겠느냐고 말했고, 나는 망설임 없이 그거야! 라고 말했다. 그런데 연잎밥을 하는 식당이 바로 양동마을 안에 있는 초록식당이라는 곳이었다. 우리는 걸어서 초록식당으로 들어갔다. 오래전부터 먹어보고 싶었던 연잎밥을 양동마을에서 먹다니. 나는 마치 무슨 계시를 받은 구도자처럼 경건한 마음이 되었다. 흐린 날씨도, 연잎밥도, 새도, 초가집과 기와집들도, 모든 것들이 다 적절했다. 누군가 경주의 불국사와 석굴암, 첨성대가 식상하다고 말한다면 양동마을에 가보라고 말할 것이다. 지붕마다 환하게 불을 켠 초가집들을 보라고. 경주에 다시 올 이유가 생겨서 돌아오는 길이 그리 아쉽지만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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