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버스를 타고

시월의숲 2019. 3. 11. 22:12

차가 고장이 나서 정비소에 맡겼다. 엔진에 구조적인 결함이 있어 업체측으로부터 리콜이 된 것이다. 중고로 구입해서 오 년 가까이 타고 다니다가 갑자기 정비소에 맡기고 돌아오려니 무언가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정비소에서는 수리하는데 대략 나흘 정도 걸린다고 했다. 정비소에 차를 맡기고 콜택시를 불렀다. 콜택시 기사에게 버스터미널로 가자고 말하자 어느 방면으로 가면 좋을지 물었다. 나는 그 지역의 지리를 잘 알지 못해서 그냥 가까운 길로 가시면 되죠 했더니, 갑자기 구구절절 설명을 하면서 이쪽으로 가면 신호가 별로 없어서 빨리 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렇게 하시라고 말하고 차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기사는 아마도 내가 이곳의 지리에 익숙하지 않다는 걸 알고 돌아가는 눈치였으나 나는 잠자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뭐, 알면서도 속아주는 거지 생각하면서.


터미널에 도착해서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의 차 시간을 알아보니 직통으로 가는 버스는 하루에 한 대인데, 그것도 오전에 있었다. 나는 약간 어이가 없었으나 이내 진정하고 집과 가까운 지역의 버스 시간을 알아보았는데, 그것도 한 시간 뒤에 한 대가 있고, 두 시간 뒤에 한 대가 있는 식이었다. 아니, 시골 면지역의 작은 버스정류장도 아니고 시지역의 버스정류장인데 이렇게 밖에 운행을 안한다고? 나는 한 대 맞은 듯 얼얼한 기분이 되어, 매표소 직원에게 잠시 생각을 해야겠다고 말하며 뒷 사람에게 자리를 비켜주었다. 이 삼십 분에 한 대 씩 있을 거라는 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도움을 청할 사람도 생각나지 않았다. 도움이라니? 한 시간 정도 더 기다려서 가면 되는데 무슨 도움이란 말인가? 나는 스스로 다독이며 한 시간 뒤에 있는 버스표를 끊고 대기실 의자에 앉았다.


갑자기 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하니 막막함이 밀려왔다. 그 기분을 떨쳐내고자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대합실 왼쪽 끝에 자그마한 분식집이 있었다. 마침 저녁 시간이었고, 집에 도착하면 저녁 먹기에는 늦은 시간일 거 같아서 망설임 없이 분식집으로 들어가서 가락국수와 김밥을 시켰다. 당연하게도 인상적인 맛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맛이 없지는 않은 그런 맛이었다. 그렇게 저녁을 해결하고 버스를 탔다. 실로 오랜만에 타보는 버스였다. 내 자동차가 생기기 전까지는 당연히 버스를 타고 다녔으니까 말이다. 시외버스도 그렇지만 더 오랜만이라고 느꼈던 것은 시내버스였다. 시외버스를 타고 와서 시내버스를 갈아타는 것, 시내버스를 기다리는 것, 시내버스 요금을 지불하는 것, 시내버스의 손잡이를 잡고 서서 버티는 것, 내가 내려야 할 곳이 다가오면 버튼을 누르는 것, 시내버스 안에 타고 있는 사람들의 피곤하거나 무표정한 모습을 보는 것, 그 모든 것들이 다 오랜만이었다.


오랜만에 타 본 버스는 요금이 백 원 올랐고, 정지버튼이 크고 누르기 쉽게 바뀌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언제 버스를 탔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그렇게 의자에 앉아 차창밖을 바라보고 있으니 돌고 돌아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타지 않아도 버스는 언제나 달리고 있고, 다만 나만이 그곳을 벗어났다가 다시 돌아왔구나, 하는. 그것은 순간 젖어든 향수 같은 것이었을까? 지금보다 어렸을 때 힘겨워하며 타고 다녔던 버스가 한편으로는 그리웠던 것일까.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진정 버스인가 그 시절의 나인가. 나는 그 시절로부터 얼마나 많이 흘러왔는가. 변한 것은 나인가, 나를 둘러싼 주변의 환경인가.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과연 같은 사람인가. 만약 같다면 변하지 않았기에 무서운 일이고, 같지 않다면 변했다는 것이기에 또한 무서운 일이다. 아니, 무섭다기보다는 슬픈 일이던가?


이상스런 상념에 젖어들었다. 주위는 어두웠고, 차창 밖으로는 직접 운전하면서 다녔을 때와는 다른 밤의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낯선 땅에서 낯선 버스를 타고, 낯선 곳을 향해 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은, 실로 오랜만에 버스를 탔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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