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안드레 애치먼, 《그해, 여름 손님》, 잔, 2018.

시월의숲 2019. 3. 24. 23:44

"넌 책이 그렇게 좋아?" 어둠 속에서 광장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며 마르지아가 물었다. 음악이나 빵, 소금 들어간 버터나 잘 익은 여름 복숭아를 좋아하느냐고 물은 것처럼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해하지 마. 나도 책을 좋아하니까. 하지만 아무한테도 말하진 않아." 마침내 독서에 대한 진실을 이야기하는 사람을 보는구나 싶었다. 왜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는지 물었다. "몰라……." 생각해 볼 시간이 필요하거나 답하기 전에 얼버무릴 때 마르지아가 즐겨 하는 말이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숨기는 게 있어. 자신을 숨기거든. 자신을 숨기는 이유는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인 경우가 많아."(148~1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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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퍼할 시간은 앞으로도 많다. 들은 대로 이별의 아픔은 교활하고 쉽게 떨쳐지지 않을 수도 있을 터였다. 슬픔으로 슬픔을 중화시키는 것은 시시하고 비렬한 일이다. 나는 이미 그 방면의 고수니까. 슬픔이 맹렬하게 덮치고 절대로 사라지지 않으면 어떡하지? 슬픔이 떠나지 않고 계속 머물러 그에 대한 갈망으로 내 삶과 육체에서 뭔가 중요한 것이 빠진 듯한 기분에 빠져든 밤처럼 영향을 미친다면? 그를 잃은 건 집 안에 있는 모든 사진에서 보이는 내 손을 잃은 듯한 느낌일 것이다. 그것이 없으면 나는 다시 내가 될 수 없으리라. 잃을 걸 예상하여 준비까지 했지만 없으면 살 수 없다.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꿈꾸지 않으려고 기도하는 것만큼 똑같이 아프다.(2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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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깝기는 했는지 몰라도 난 네가 가진 것을 가지지 못했다. 언제나 뭔가가 나를 저지하거나 길을 막아섰지. 네가 네 삶을 어떤 식으로 사는지는 네 마음이다. 하지만 기억해. 우리의 가슴과 육체는 평생 한 번만 주어지는 거야. 대부분의 사람은 두 개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처럼 살아가지. 하나는 실물 모형의 삶, 또 하나는 완성된 형태. 하지만 그 사이에 온갖 유형이 존재하지. 하지만 삶은 하나뿐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슴이 닳아 버리지. 육체의 경우에는 아무도 바라봐 주지 않고 가까이 오려고는 더더욱 하지 않는 때가 온다. 그러면 슬픔뿐이지. 나는 고통이 부럽지 않아. 네 고통이 부러운 거야.(27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