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그렇게, 절대로 무의미한 것이 되어

시월의숲 2019. 4. 7. 20:12

인간은 늘 의미를 추구하는 동물이라고는 하지만, 나는 때로 '아무 의미 없음'의 상태로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오래전 텔레비전 광고 카피처럼,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지만 더욱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상태 말이다. 그것이 퇴근을 하고 그 누구도 만나지 않고 오로지 집에 혼자 있을 때 내가 무엇보다 바라는 일이다. 오래전 어느 책에서 인간은 無에서 왔으므로 다시 無로 돌아가고자 하는 충동이 있다는 문장을 읽었는데, 어쩌면 그런 충동 때문인지도 모르고, 단순히 업무와 사람들에 시달려서 극히 피곤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늘 무엇엔가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는 인간들의 행위에 질려버렸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인간이 그렇게까지 의미를 추구하는 이유는 실제 삶이란 무의미의 집합체라는 것을 반증하기 때문은 아닌가. 그러니까 인간이 죽을 때까지 의미를 추구하는 이유는, 그래야만 이 무의미한 세상에서 미치지 않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은 아닌가. 하지만 나는 그 강박적인 의미 찾기 게임에서 벗어나고 싶다. 지극히 무의미하면 무의미한 채로, 이 무의미한 세상에서, 무의미하게 살고 싶은 것이다. 배수아의 소설 <철수>에 나오는 문장처럼, '그렇게, 절대로 무의미한 것이 되어 시간을 살아남기'를 바란다. 때때로 그런 생각이 나를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이 사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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