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말무덤(言塚)

시월의숲 2019. 3. 26. 22:27












출장을 다녀오는 길에 말무덤이라는 표지판을 보았다. 나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차를 세우고 그곳으로 향했다. 가까이서 보니 馬의 무덤이 아니라 言의 무덤이었다. 조금 걸어 올라가니 커다란 무덤이 하나 나왔는데 그 앞에 말무덤의 유래가 적힌 안내판이 있었고 주위에는 말에 관한 잠언들이 새겨진 돌이 군데군데 놓여 있었다. 안내판에는 말무덤의 유래가 아래와 같이 쓰여 있었다.


옛날부터 각성바지들이 모여 살던 마을로 사소한 말한마디가 씨앗이 되어 문중간 싸움이 그칠 날이 없자 마을 어른들이 원인과 처방을 찾던 중 지나가던 과객이 예방책을 일러준대로 말무덤을 만든 후 마을이 평온해져 현재에 이르고 있음.


말무덤이 있는 언덕에는 바람이 많이 불었다. 말무덤에 서서 온몸으로 바람을 맞으며 조용히 숨을 쉬고 있는 듯한 작은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오래전 이곳에서는 언행이 거친 사람들이 모여 살며 다툼이 그칠 날이 없었다지만, 지금은 그저 바람소리만 요란할 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저 말무덤이 모든 거친 말들을 거두어 갔기 때문일까? 거칠고 모진 말뿐만 아니라 따뜻하고 부드러운 말까지 모두 거두어간 것은 아닌지 순간 걱정스러웠지만, 내 그런 기우를 비웃기라도 하듯 마을 아래 쪽에서 아주머니들의 웃음소리가 한바탕 들려왔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말무덤을 뒤로 한 채 걸어나왔다. 모든 상처되는 말들을 다 묻어버릴 수 있기를 바라면서.


말무덤이 있는 언덕 한쪽 면으로 사람들의 무덤 또한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러니까 그곳에는 言의 무덤도 있고, 人의 무덤도 있었다. 사람들의 무덤을 보면서 생각했다. 말무덤을 만든 사람의 지혜는 어쩌면 사람들의 무덤을 통해서 나왔는지도 모르겠다고. 또한 그곳은 결국 言의 덧없음 나아가 生의 덧없음을 말해주는 곳일지도 모르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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