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자신만의 먼 북소리를 따라서

시월의숲 2019. 3. 31. 21:06

특정한 나이가 되면 반드시 무언가를 해야만 하는 것이 있는 걸까? 마치 무라카미 하루키가 마흔이 되기 전에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들려오는 먼 북소리에 이끌려 이탈리아에 갔듯이. 반드시 어떤 것을 매듭짓고, 무언가를 해야만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것일까. 요즘 이런 생각이 나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이건 내가 나이가 들었다는 의미일까.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는 강박이 조급함을 만들어내고 급기야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고 후회하게 만드는 것이다. 자신만의 소소한 다짐을 하는 건 늘 있는 일이었다. 그 다짐의 성취 여부와는 상관없이 늘 크고 작은 무언가를 다짐했고, 포기하고, 때론 성취하기도 하면서 삶을 살아왔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어느 특정한 나이라는 건(그건 누가 만들어 놓은걸까?) 자신이 살아온 삶을 전체적으로 뒤돌아보게 하고, 앞날을 다시 한 번 더 생각해보게 하는 계기가 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서른 살 혹은 마흔 살 나아가 쉰 살. 사람들은 그 시기에 자신의 나이를 새삼 의식하게 되고, 살아온 날과 살아가야 할 날들에 대한 생각으로 제법 진지해진다. 시간이 갈수록 시간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지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지금껏 해 온 것에 대해서는 생각나지 않고,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다는 허탈감과 얼마남지 않은 삶에서 무언가를 해내야겠다는 조급함만으로 온 몸이 달아오른다. 어쩔 줄을 몰라 망연자실한다. 어쩌면 무언갈 해야내 한다는 마음보다는 지금까지 살면서 도대체 내가 이룬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허탈감이 더 클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타인과의 비교 또한 자신의 재능 없음과 나태함을 뼈져리게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그는 벌써 내 나이 때 책을 냈구나, 혹은 소설이나 시를 써서 대중들에게 자신을 알렸구나 하는 따위의. 생각해보면 타인과의 비교만큼 어리석은 행위도 없을텐데, 그 또한 어쩔 수 없게 하게 되는 것들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그 모든 것들이 지금 자신의 나이와 결합될 때,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로 빠져버린다. 갈수록 시간이란 무섭게 다가오고, 시간을 잊기 위해서 우리는 몸부림을 친다. '특정한 나이'라는 건 애초에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특정한 나이가 아니라 시간이 자신에게서 빠져나가고 있다는 자각이, 우리를 조급하게 만드는 것이다. 내게 머물러 있는 짧은 시간을 너무나 헛되이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 그것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크게 우리를 옥죄어 올 것이다. 그러니 '특정한 나이'에 얽매일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시간을 후회없이 보내면 되는 것이다. 정답은 간단하다. 하지만 어떻게? 하루키가 들었다는 '먼 북소리'는 도대체 언제 들려오는 것이던가? 하지만 내 내면의 소리에 귀기울인다고 해도 내가 하루키처럼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탈리아로 떠나는 모험을 감행할 수 있을까? 하루키는 하루키고 나는 나인데? 이것은 은유다. 하루키의 이탈리아처럼 나만의 이탈리아가 내게도 있을 것이라 믿는 수밖에. 안달하지 않고, 의연하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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