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사월의 햇살에 잠시 취했는지도

시월의숲 2019. 4. 21. 20:30

아버지의 병원 진료를 마치고 점심을 먹으러 팔공산 동화사 아래에 있는 '산중'이라는 식당에 갔다. 몇 달 전에 우연히 이곳에 들러 곤드레밥을 먹고 나서 무척 좋았다는 생각에 다시 한 번 더 오게 된 것이다. 손님은 그때 보다 더 많았다. 아무래도 계절이 계절이다보니 등산객들이나 나들이객들이 몰린 탓이리라. 아버지와 나는 정갈하게 나오는 음식을 남김없이 다 먹고 식당을 나왔다. 가는 길에 동화사에 들러 산책을 할까 싶었지만, 아버지는 저번에 와보지 않았냐며 그냥 가자고 하셨다. 대신 우리는 지나가면서 본적 있던 카페에 들러 커피를 마셨다. 날씨가 좋아서 커피를 들고 테라스로 나갔다. 따사로운 햇살과 적당한 바람, 춥지도 덥지도 않은 온도가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커피를 다 마시고 집으로 가는 길에 길을 잘못들어 파계사에 가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정말 우연이었을까 싶지만, 어쨌거나 내비게이션을 잘못 보는 바람에 파계사 주차장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예전에 동화사에 왔을 때, 인근에 파계사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가까이, 그것도 가는 길에 있을 줄은 몰랐다. 그도 그럴것이 저번에 왔을 때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그냥 지나쳤던 것이다. 우연히 가게 된 파계사는 사찰이 주인이라기보다는 숲 속의 나무들이 주인이라는 느낌이 더 강했다. 물론 우리네 산사들이 대부분 자연과 어울어져서 어느 누가 주인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는 않지만 말이다. 파계사에서 받았던 그 느낌은 이백오십 년이나 되었다는 느티나무 때문인지도 모르고, 봄 햇살을 맞아 막 돋아난 연둣빛의 잎사귀들 때문인지도 몰랐다.


사월의 햇살은 무척이나 따사롭고 눈부셔서 그 햇살을 받는 지상의 모든 것들에게 축복을 내려주는 듯 했다. 그 축복 속에서, 온통 연둣빛의 향연 속에서 아버지와 나는 천천히 걸으며 그곳을 둘러보았다. 내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그저 사월의 파계사를 걷고 있었을 뿐인데. 사월의 숲을, 금방 칠한 것처럼 싱그럽던 새순을, 이름모를 야생화를, 아버지의 등에서 부서지던 사월의 햇살을 그저 바라보았을 뿐인데. 늘 그렇듯 나는 그 자리에 누워서 자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그 모든 것들이 나를 안온한 잠으로 인도하는 것만 같았다. 약간의 갈증이 나기도 했다. 나는 숲에서 흘러나오는 듯 보이는 물을 한모금 마셨다. 그러자 갈증이 사라지고 혼몽하던 정신도 맑아졌다. 나는 어쩌면 이 봄에 취했는지도 모른다. 이 따사로운 햇살과 눈부신 연둣빛에 잠시 젖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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