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오래된 영혼을 위하여

시월의숲 2019. 5. 8. 22:47

작년에 허수경 시인의 타계 소식을 듣고 책장에 꽂혀 있는 시인의 시집을 생각해냈다. 제목은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였는데, 내가 어떤 경유로 그 시집을 가지게 되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확실한 건 내가 그 시집을 직접 사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오래전 도서관에서 근무할 때 우연히 얻게 되었던 거 같은데, 그건 사실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그 시집이 지금, 나에게 있다는 사실이니까. 솔직히 허수경 시인의 타계 소식을 듣기 전까지 그 시집은 내 책장에 오래도록 꽂혀 있기만 했을 뿐, 한 번도 눈여겨 본 적이 없었다. 헌데, 이상하지,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죽음이 그 사람의 시집을 읽는데까지 나아가게 하다니. 그 사람이 이제는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과 지구 어딘가에는 살고 있다는 사실의 차이가 무엇인지. 뭐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시집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제 그 시집을 다 읽었다.


내가 읽은 시집은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와 <혼자 가는 먼 집>에 이은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이었는데, 그는 이미 80년대와 90년대 두 권의 걸출한 시집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는 작가였다. 그리고 내가 읽은 세 번째 시집은 두 권의 시집을 내고 돌연 독일로 유학을 가서 고고학을 전공하면서 써낸 시집으로, 앞의 두 시집과는 사뭇 다른 세계를 그리고 있다는 평이 있었다. 나는 앞 선 두 권의 시집을 읽어보지 않았기에 시인의 시세계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독일이라는 낯선 땅으로 유학을 가서, 이방인으로써의 삶을 살아가는 시인의 시세계가 그 이전과는 달라질 수 있으리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바로 그 지점에 상당한 흥미를 느꼈다. 그는 왜 돌연 한국에서의 삶을 등지고 독일로 유학을 갔던 것일까, 라는 의문에서부터, 왜 하필 고고학이었을까 라는 의문과 어떻게 그렇게 오랜 시간을 낯선 땅에서 살 수 있었는지, 그리하여 결국 죽을 때까지 모국에 돌아오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허수경이라는 시인에 대한 궁금증이 더욱 일었다. 물론 타인의 눈으로 봤을 때 상당히 독특하고 이해하기 힘든 일로 비춰질 수도 있을 그의 삶의 이력이 정작 그 자신에게는 특별히 어떤 이유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내면의 어떤 충동 혹은 갈망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현재 자신의 삶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선택하는 이들의 절박한 그 심정이 늘 궁금했다.


내 그런 의문과 궁금증에 대한 하나의 실마리가 될 수 있을까.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의 뒷편에 실린 신경숙의 발문에서 그는 시인 허수경이 소설을 쓰고 난 후 소설가로 불리길 원하는가, 물은 적이 있다고 했다. 그에 대한 대답으로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무엇을 하든 결국은 시로 가기 위한 길일 거야.' 라고. 시로 가기 위한 길이라니! 시로 가기 위한 길은 그렇게 낯선 공간 속으로 들어가 깊디 깊은 고독에 몸을 담그는 일이어야만 하는가? 나는 그 문장을 읽고 크리스토프 바타유의 <다다를 수 없는 나라>에 나오는 수사와 수녀를 떠올렸다. 어떤 근원으로 걸어들어가 결국 망각 속에서 자유를 얻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시인 허수경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서, 그의 삶, 독일행과 고고학, 시의 관계를 좀 더 살펴보기 위해서는 그의 시집과 산문집을 더 읽어야 할 것이다. 마침 내겐 유작이 되어버린, 개정판으로 나온 <그대는 할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가 있다. 그 책의 제목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나는 왜 그의 얼굴이, 그의 시가 자꾸만 아파지려 하는지, 왜 울음을 목으로 삼키고 있는 것만 같은지, 지금은 이미 세상에서 사라지고 없지만, 사진 속의 시인의 모습만 봐도 왜 이미 그는 오래된 유적처럼 부서져 내리고 있는것만 같은지 알 수 없다. 그 마음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서라도 나는 그의 시를 읽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