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우연과 우연을 둘러싼 것들

시월의숲 2019. 5. 12. 22:57

처음에는 우연이라는 말을 믿었다. 우연은 정말 우연히 찾아오는 거라고. 우연히 누군가를 만나고, 우연히 어딘가 가게 되고, 우연히 예기치 않은 상황과 맞닥들이게 된다고.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우연이라는 건 사실 필연 혹은 그보다는 덜 절실한 무언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도 알 수 없는 모종의 계획이 어느 시점부터 나도 알 수 없는 이유로 서서히 작동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연이라는 건, 정말 우연이 아니라 그것에 대해서 몇 번이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생겨지게 되는, 일종의 상호작용에 의한 이루어짐이 아닌가 말이다. 그렇다면 우연이라는 건 없다. 우리가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나의 사소하지만 실은 중요했던 여러가지 선택에 의하여 생겨난 서로간의 이끌림(그것이 나쁜 것이든 좋은 것이든) 때문인 것이다. 그런게 아닐까?


내가 장황하게 우연이니 필연이니 하는 말을 꺼낸 이유도 오늘 내가 다녀온 어떤 마을에 대해서 말하기 위함이다. 그곳은 내가 사는 곳에서 불과 오 킬로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어제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종종 둘러보곤 하는 누군가의 사이트에서 그곳에 관한 포스팅을 보게 되었고, 그곳이 내가 사는 곳에서 무척 가까운 곳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 평소에도 민속마을이나 서원, 정자, 산사 등을 무척 좋아하기에 그곳의 풍경사진을 보고 무척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오늘 점심을 먹고 그곳으로 향한 것이다. 마을이름이 가일마을이었는데 하회마을이나 양동마을처럼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오는 곳이 아니라서, 얼핏 지나친다면 평범한 농촌마을로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곳곳에 오래된 나무들과 고풍스러운 고택들을 숨기고 있어서 천천히 걸으며 보물찾기 하듯 고택들을 둘러보는 재미가 있었다.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지형을 가진 마을로써 마을 뒷편으로는 산이 있고, 마을 앞으로는 개울이 흐르고 가곡지라는 저수지도 있었다.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오월의 눈부신 햇살 아래 이백 년이 넘은 나무들이 커다란 그늘을 드리우고 그늘 아래로는 시원한 바람이 지속적으로 불어와 저수지 표면에 미세한 물비늘을 만들었다. 나는 그리 크지 않은 마을의 이곳 저곳을 둘러보았다. 목이 마를 땐 가져간 물을 조금씩 마셨다. 다리가 아플 때는 고택의 마루에 앉아 바람을 쐬면서 마당에 심어놓은 보라색과 노란색의 창포꽃과 장독대의 그림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고택의 기와에 달아놓은  풍경이 바람에 흔들리며 경쾌한 소리를 냈다. 이 길, 저 길 왔다갔다 하면서 같은 집 마당을 몇 번이고 지나치게 되었는데, 거기서 본 백구는 내가 지나갈 때마다 인기척에 놀라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왜 저렇게 왔다갔다 하는 거야? 하는 표정으로. 마을을 다 둘러보고 난 뒤 좀 쉬었다 갈 겸 해서 저수지 앞에 있는 정자에 앉아 책을 읽었다. 유시민의 <청춘의 독서>였는데, 그곳에서 유시민의 책을 읽고 있으니 작가의 적극적이고 현실참여적인 목소리가 어쩐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곳은 너무나도 조용하여, 들리는 것이라고는 바람소리와 경운기 지나가는 소리, 풍경소리가 다였기 때문이다.


나만 알고 싶은 곳이 있다. 그곳이 내겐 그런 곳이었다. 사람들에게 더 알려지기를 원치 않으며 내가 원할 때 조용히 왔다가 조용히 가고 싶은 나만의 장소. 그리고 완벽한 일요일 오후라는 게 있다면 바로 오늘이 아닐까 생각했다. 마치 꿈을 꾸는듯, 아련한. 미래의 어느 날, 내 몸과 마음이 많이 지칠 때, 불현듯 떠오르는 곳이 바로 이곳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가만히 눈을 감으면 오늘 보았던 오월의 햇살과 커다란 나무 그늘과 물비늘을 그리며 불어오던 시원한 바람과 돌담길, 오래된 기와집들과 창포꽃이 떠오른다면. 그렇다면 내 지친 몸과 마음에 많은 위로가 될텐데. 어쩐지 그럴 수 있을 거라는 예감이 든다. 우연히, 아니 우연하지 않게 가게 된 한 마을이 내 삶의 치유제가 될 수 있을 거라는 기대 말이다. 그러니까 처음 내가 우연에 대해서 했던 말로 다시 돌아가자면, 내가 오늘 그곳에 갔던 이유도 사실은 우연이 아니라 내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했던 어떤 열망이 나를 그곳에 당도하게 한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