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당신의 결여는 무엇입니까?

시월의숲 2019. 6. 1. 15:07

어김없이 장미의 계절은 오고, 늘 그랬듯 선택의 기로에서 무언가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되고, 시간은 흐르고, 그래서 또다시 지금 이 자리, 이 시간 속에 존재하고 있는 나를 발견합니다. 유월의 첫 날입니다. 그 말은 어제는 오월의 마지막 날이었다는 뜻이겠지요. 원래는 어제 저녁에 무언가를 쓰고 싶은 마음이 있었으나 쓰지 못했고, 오늘도 늦잠을 자고 11시 넘어서 일어나 아침겸 점심을 먹고, 일주일치의 옷가지를 세탁기에 돌리고, 진공청소기로 집안의 먼지를 제거하고, 멍하니 앉아 텔레비전을 보다가 지금 컴퓨터 앞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충전의 시간인지, 방전의 시간인지 알 수 없는 시간이 내게서 흘러갑니다. 그동안 누적된 피로로 아침 출근 길에 몰려오는 잠을 쫓아내느라 혼이 났고, 일을 하면서도 연신 하품을 해댔으며, 정신을 차리기 위해 평소보다 많은 커피를 마시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집과 일터만 반복적으로 왔다갔다 한 건 아니라서, 주말에는 아버지 생신을 핑계로 동생 가족들을 만나 미술관에도 가고 벽화마을도 가고 맛있는 밥을 사 먹기도 했어요. 그리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그런 중에 또 근무처를 옮겨야하는 시기가 와서 내신서를 썼다는게 좀 특별하다면 특별하달까요.


매번 일정한 시기가 되면 돌아오는 인사철이 저에게는 무척이나 큰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이번에는 또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매번 막막한 심정이 되곤 하거든요. 이번에도 그러했습니다. 나를 아는 사람들에게서 오는 이런 저런 전화를 받으니 더 심란한 마음이 들기도 했어요. 이건 단순히 근무처를 옮겨야만 한다는 부담감이라기보다는, 지금보다는 조금 편한 곳으로 가고자 하는 마음이 더 크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나에게는 남들이 가질법한 커다란 야망(?)이랄게 없고, 어느 곳이나 그 나름의 힘듦과 고충은 있을 것이며, 어디에 가든 내가 맡은 일만 열심히 하면 된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때론 내 우유부단함을 감추기 위한 변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특히나 내신서를 써야하는 인사철만 되면 그런 기분이 들곤 합니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내신서는 내 손을 떠났고, 어떤 결과가 오든 받아들이는 일밖에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책을 좀 많이 읽고 싶은데, 그게 마음처럼 되지 않습니다. 아마도 인터넷 때문인 거 같아요. 퇴근을 하고 집에 오면 주로 하는 것이 인터넷인데, 인터넷을 하다보면 책을 읽고자 하는 마음이 들지 않거든요. 내게 인터넷과 독서는 아마도 상극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 읽고 있는 예니 에르펜베크의 <모든 저녁이 저물 때>라는 소설의 진도가 잘 나가지 않습니다. 이 소설도 오로지 배수아가 번역을 했기 때문에 읽게 되었는데, 문장의 맛이 분명 있는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읽는 속도가 느려서 좀 속상하기도 합니다. 조바심을 내지 않으려 하지만, 아직 읽지 않고 책장에 고요히 꽂혀 있는 책들을 볼 때면 자괴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나 봅니다. 어떡하겠습니까? 그저 천천히, 조용히, 늘 그랬듯 묵묵히 읽는 수밖에는.


혼자 있어도 세상에서 일어나는 소식은 듣고 있습니다. 헝가리에서 일어난 유람선 전복사고로 우리나라 국민 7명이 사망하고 19명이 실종되었다는 안타까운 소식과,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둘 다 내게는 아주 먼 일처럼 느껴지지만 또한 아주 가까운 일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 일에 대해서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오늘, 아버지와 함께 저녁에 봉준호 감독의 영화를 보러가기로 했습니다. 아버지와 단 둘이 영화를 보는 건 처음입니다. 그동안 나는 아버지를 영화와는 거리가 먼 존재로 느꼈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는 걸 얼마전에 알게 되었거든요. 영화관에 가기 싫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아버지가 사실은 영화 보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내게는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나는 아직 한참 모자라는구나, 생각했어요. 개인적으로도 그 영화가 무척 궁금하지만, 아버지가 보았을 그 영화의 느낌이 무척 궁금해집니다.


그렇게 유월의 첫 날이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출근과 퇴근을 하게 될 것이고, 한 달이 지나면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날지 판가름이 날 것입니다. 새로운 영화가 나오면 보러 갈 것이고, 종종 새로운 곳을 보러 가기도 할 것이며, 지금 읽고 있는 책을 다 읽으면 또다른 책을 읽게 되겠지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것이고, 때론 그들에게서 기쁨과 슬픔, 분노를 느낄 수도 있을 것이며, 드물게는 위로를 받을 수도 있겠지요. 내게 결여된 것은 무엇인가요? 그건 나도 알지 못합니다. 알지 못한 채로 사는 것이 또한 삶이기도 하니까요. 당신은 어떻습니까? 당신의 일상이, 당신의 취미가, 당신이 좋아하는 음식이, 당신이 최근에 본 영화와 당신이 읽고 있는 책과 당신이 듣고 있는 음악이 궁금합니다.


당신의 결여는 무엇입니까? 그또한 무척 궁금합니다. 어쩌면 그것이 내가 가장 궁금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의 결여와 당신의 결여는 같은 색깔일까요? 무언가 결여된 채로 삶을 사는 것에 대해 하루키는 어떻게 말할지 그것도 문득 궁금해집니다. 하루키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늘 자신의 결여를 깨닫고는 어디론가 모험을 떠나기로 결심을 하니까요. 이대로는 살 수 없어! 라고 선언하듯 말입니다. 아, 하루키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아직 읽지 않은 하루키의 소설이 떠오르네요. 이러다 또 한심한 자신을 책망하는 마음이 들까봐 더는 이야기하기 않겠습니다. 부디 각자의 결여를 잘 보듬어 안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두서없는 이 글을 마쳐야 할 것 같습니다. 부디 잘 지내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