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슬프지만 자명한 일

시월의숲 2019. 6. 22. 20:16

오랜만에 술을 마셨다. 그것도 꽤 많이 마신 것 같다. 아니다, 많이 마신게 아니라 급하게 마셨던가? 급하게 마시면 빨리 취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그래서 빨리 정신을 잃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천천히 마시려고 노력했는데, 일단 술을 마시면 취하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술을 천천히 마시려고하는 내 이성이 마비가 되고, 내가 술을 빨리 마시고 있는지, 아니면 천천히 마시고 있는지 모를 지경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어쨌거나 어제는 늦게까지 술을 마셨고, 오늘은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만 있었다. 오전에 전화가 한 통 왔지만 받을 수 없었다. 정오 쯤 일어나려고 했지만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어서 계속 누워서 잤다. 겨우 일어나보니 하루가 다 지나가 있었다.


어제는 내 송별회 자리였다. 인사발령이 났고, 나는 또 다른 곳으로 가게 되었다. 매번 주기적으로 근무처를 옮겨야 하는 직업이라, 그 일에 익숙해질만도 한데 이상하게 인사발령은 인숙해지지 않는다. 이번에는 특히나 개인적으로 무척 고생하면서 일을 했기에 자리를 옮기려 하니 시원한 마음보다는 섭섭한 마음이 더 든다. 이상하지. 이곳에서 벗어나기만을 바란 적도 있는데, 이제와서 막상 떠나려고 하니 섭섭한 마음이 더 드는 것은 왜일까. 아무튼 누가 지었는지 시원섭섭이라는 말은 정말 적확한 표현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인사발령이 나고 어제 송별회 자리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내 마음은 그렇게까지 혼란스럽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제 몇몇 직원들과의 송별회 자리를 가지면서 내 마음이 더 혼란스러워짐을 느꼈다. 어쩌면 그건 혼란스러움이 아니라 걱정일 수도 있겠다.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에 대한 걱정.


어떤 이는 자신감을 가지고 일을 해나가면 된다고 하지만, 내겐 정말 어려운 일이다. 나는 처음 누군가를 만나는 일도, 처음 새로운 일을 하는 것도 무척 힘들어하기 때문이다. 자신감은 어떻게 하면 생기는 것인가? 왜 어떤 이들은 그렇게 자신만만해 보이는 걸까. 나는 늘 자신감으로 충만한 이들을 부러워했다. 그것은 나 스스로가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이고, 새로운 인간관계에 적응해야 하는 일에 대한 두려움이 크기 때문이다. 이런 마음은 매번 인사발령이 나 자리를 옮겨야만 하는 이런 시기에 더욱 커진다. 어떻게든 적응을 하긴 하겠지만, 그렇게 적응하기까지의 마음을 나 스스로가 다독여야 하고, 때론 분노하거나 슬퍼하거나 아파해야 할 것임을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모든 감정의 격랑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지친다. 이럴때는 타인의 위로와 칭찬도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어쩔 수 있을까. 내 마음은 내가 다스리는 수밖에는 없음을. 그렇게 내가 나를 위로하는 수밖에. 그건 슬프지만 자명한 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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