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점심을 먹자마자 잠이 들었다가 깨서 저녁을 먹고 다시 잠을 잔 이야기

시월의숲 2019. 7. 24. 21:15

어제 숙직을 마치고 오늘 아침에 당직휴무를 내고 집에 왔다. 숙직을 하고 나면 이상하게 피곤함이 머리 위에서부터 몰려오곤 하는데, 오늘도 예외는 아니어서 집에 와서 점심을 먹고 졸기 시작해서 오후 내내 약에 취한 사람처럼 계속 졸았다. 중간에 사무실에서 전화가 와서 잠시 깼지만 이후로도 계속 잠이 쏟아져서 견딜 수 없었다. 새로 발령이 나고 새로운 곳에서의 부담스런 업무가 지나가서인지, 그동안 쌓였던 피로 때문인지 아니면 습한 더위 때문인지 알 수 없다. 어쩌면 그 모든 것들이 다 나를 오늘같은 잠에 빠지게 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점심을 먹자마자 급격하게 쏟아지는 잠 때문에 그 자리에 누워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그것은 마치 소리소문없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아주 자연스럽게 절벽에서 떨어지듯, 어떻게 해도 손 쓸 도리가 없는 잠이었다.

 

그렇게 몇 시간을 자고 일어나니 저녁이 되었다. 점심을 먹고 자기 시작해서 깨보니 저녁이라 또 저녁을 먹지 않을 수 없었다. 냉장고에 들어있는 냉동 볶음밥을 꺼내고 언제 사놓은지 모를 달걀을 꺼냈다. 끼니를 때울만한 것이라고는 그것 밖에 없었다. 밥을 다 먹은 뒤에는 시들어가고 있는 복숭아 한 알과 키위 한 개를 꺼내 먹었다. 겉이 쭈글쭈글한 복숭아를 보고 있으니, 나는 냉장고를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시들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먹는 용도로 사용하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집에서 거의 밥을 해먹지 않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요즘엔 업무에 적응하느라 아버지 집에도 자주 가지 못하고 있다. 나는 그곳에서 주로 요리를 해서 아버지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식재료를 사놓아도 직접 요리를 하지 않는 아버지는 내가 갈 때까지 국이 없으면 없는대로, 반찬이 없으면 없는대로 식사를 하셨다. 내가 아버지의 식사를 챙기지 않고 나혼자 살면서 계속 밥을 해먹었다면 냉장고에 식재료라도 있을터인데, 내가 사는 아파트에는 주말에 먹을 식빵이나 파스타면, 아침에 먹을 씨리얼이나 우유밖에 없으니, 어쩌다 혼자 집에서 저녁을 먹어야 할 때가 있으면 좀 난감해지곤 한다. 어쩌다 먹는 저녁인데 식재료를 많이 사다 놓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예 없는 것도 불편하고... 한 끼를 먹기 위해 요리를 하는 것은 먹는 것보다 버리는 것이 더 많기 때문에 되도록 간단하게 먹으려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켜먹기도 하는데, 그것도 그리 달갑지는 않다.

 

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먹는 것에 대한 이야기로 빠져버렸다. 아무튼 오늘은 점심을 먹자마자 잠이 들었다 깨서 저녁을 먹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잠이 오기 시작한다. 머리가 무겁고, 몸이 축 처진다. 일기예보에는 태풍이 왔다 가고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될 것이라고 떠들고 있다. 올 여름은 별로 덥지 않다고 떠들던 때가 엊그제인데, 아직 여름은 가지 않았던 것이다. 출퇴근하면서 보는 짙은 녹음이 여름의 한가운데 와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 여름에, 파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올빼미의 없음>을 다 읽고, 김애란의 <바깥은 여름>을 읽기 시작했다. 언제인가, 여름이 한창이던 때, 하성란의 <여름의 맛>이라는 소설집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여름에 여름이 들어가는 소설을 읽고 있으니 느낌이 새롭다. 그렇게 이천십구 년 칠월 하순을 지나고 있다. 여름과, 더위와, 피곤과 잠에 취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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