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이소라 콘서트에 다녀오다

시월의숲 2020. 1. 19. 15:59

처음 텔레비전에서 그녀를 보았을 때부터, 아니 처음 그녀의 음성을 들었을 때부터 나는 그녀에게 사로잡혔다. 나는 그녀의 모든 음반을 사는 것은 물론이고, 그녀가 게스트로 나오는 음악프로와 그녀가 진행한 '이소라의 프로포즈'와 라디오까지 모두 찾아서 들었다. 그렇게 들었던 그녀의 목소리는 내 귀를 타고 내 몸 속에 들어와 내 피와 세포 구석구석 아주 미세한 틈새까지 파고들어 학창시절의 나를 형성했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아마도 많이 다르거나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겠지만, 적어도 그녀의 목소리와 노래만은 아직도 생생하게 나 자신의 일부를 이루고 있음을 느낀다. 아주 오래되었거나 아주 짧게 스쳐 지나간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는 하나의 심장처럼 서로 공명하고 있음을 느낀다.


거창하게 말하긴 했지만, 정말 그런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이소라 콘서트에 갈 이유가 없는 것이다. 콘서트를 그리 자주 하지 않는 가수이기에, 드물게 콘서트를 한다는 소식을 들을 때면 어쩐지 저 먼 나라의 소식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그냥 막연히, 콘서트를 한다면 가보고 싶은데... 하는 마음만 있었다. 어쩌면 내게 그녀의 콘서트라는 것은 낯선 이국의 땅을 방문하는 것처럼 비현실적인 느낌을 내포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던 것들이 실은 마음만 먹으면 현실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 뒤 조금 대범해졌다고 해야할까. 이번에 대구에서 이소라 콘서트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망설임없이 예매를 했고, 날짜가 다가왔고, 대구에 갔으며, 실제로 공연을 보았던 것이다!


이소라가 노래하는 모습은 텔레비전에서 많이 보아왔으므로, 그녀가 콘서트에서 어떤 식으로 노래를 할 것인지 예감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무척이나 차분하고, 사색적이며, 슬프면서도 격렬한 콘서트가 될 것이라고 예감했고, 그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그녀의 체념적이면서도 고통에 찬 노래('데이트'나 '청혼' 같은 비교적 밝은 노래를 할 때조차!)는 끊일듯 끊이지 않게, 큰 흐름을 이루며 흘러나왔고, 마지막까지도 그 흐름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90분의 시간이 무척 짧게 느껴진 것은, 그녀의 노래가 여러 곡이 모여서 90분이 된 것이 아니라 90분짜리 하나의 거대한 노래를 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가수와 그녀가 직접 쓴 가사, 멜로디가 혼연일체가 된, 그야말로 '이소라' 콘서트였다고 해야할까.


공연이 끝나고도 나는 자리에 한동안 앉아 있었다. 그녀의 노래와 목소리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조금 더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지만, 그녀도, 그녀의 노래를 들었던 관객들도 모두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 사람처럼(마치 체념했다는 듯이), 마지막 노래인 'Amen'이 끝나자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나 공연장을 떠났다. 나도 더 이상의 기대를 접은 채, 아직 가시지 않은 감정의 여운을 추스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연장 밖을 나오니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려고 하는데 일부 사람들이 밤하늘을 가리키며 웅성거리고 있었다. 나는 몸을 돌려 사람들이 바라보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어둠이 내린 하늘에 달무리가, 마치 그녀의 목소리처럼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신형철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라는 책에서 '문학으로서의 이소라'에 대해서 쓴 글을 다시 읽었다. 그 글은 작가가, <나는 가수다>에 이소라가 나와서 <슬픔 속에 그댈 지워야만 해>를 불렀을 때를 회상하며 쓴 글이다(그 노래는 원래 이현우의 노래이고, 이현우의 음성으로 듣는 원곡도 물론 좋지만, 나는 이소라의 버전을 더 좋아한다). 당시 이소라는 애초 준비했던 곡을 리허설 시작 네 시간 전에 포기하고 급히 그 노래를 준비해서 불렀다고 한다.


순위에 연연했다면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그에게는 순위보다 더 중요한 다른 것이 있었을 것이다. 바로 그날, 그가 하고 싶고 또 할 수 있는 노래여야만 한다는 것. 어떤 자리이건 어떤 장르이건 능란하게 소화하는 이가 프로일 것이지만, '할 수 없는 것은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이는 예술가일 것이다. 존재의 필연성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들 말이다. 그들은 말한다. '난 그런 것은 할 수 없어요. 어제는 할 수 있었을 거예요. 내일도 혹시 가능할지 모르겠군요. 그러나 지금은, 지금은 도저히 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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