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책망의 이유

시월의숲 2020. 1. 6. 22:11

어떤 생각이 들었으나 그것은 곧 다른 생각 때문에 사라져버렸고, 다른 생각은 또 다른 생각으로 덮혔다.


생각해보면 늘 그랬으나 올해는 유독 연말의 흥청거림과 새해의 들뜬 기대와는 거리가 먼 시간들을 보냈다. 그것은 그저 다른 사람의 일처럼, 그낭 스쳐지나가는 일처럼 그저그렇게 지나간 것이다. 굳이 새해를 기념할 일도, 기념하고 싶은 생각도 없이 그냥 보통의 많은 날들이 지나가듯 그렇게. 나는 그 사실에 안도하지만, 때로 그 사실에 조금 쓸쓸해하고 있는 나 자신을 느끼고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이율배반적인 이 느낌은 무엇인가? 그저 고요히, 감정의 흔들림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이 내 유일하고도 간절한 바람이지만, 그 고요함의 이면에는 격렬하게 부딪히고 싶은 욕망 또한 있는 것인가?


나이가 들어가는 것은 자신의 감정을 컨드롤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는 의미와도 같지 않을까 생각했다. 누구보다 내 감정을 내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과연 그런가? 나는 내 감정을 잘 모르고, 때로 폭발할 것 같은 감정에 휘둘리기도 하고, 누구보다 잘 알면서 내가 나 자신의 감정을 기만하기도 하는데. 참으로 다루기 어려운 것이 인간의 감정이 아닌가. 상처를 주는 말과 위로를 주는 말이 다 나 자신의 '말'에서 나온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요즘들어 나는 내 감정의 정체에 대해서 생각하는 일이 잦아졌다. 반면에 그 감정의 정체에 대해서 쓰는 일은 줄어들었다. 나는 그것을 어떤 형태로든 쓰고 싶었으나, '그것은 곧 다른 생각 때문에 사라져버렸고, 다른 생각은 또 다른 생각으로 덮'혔다. 그것이 나를 힘들게 했다.


내가 무언가를 쓴다는 것은, 형체가 없는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것과 비슷하다. 나는 어떤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글을 썼지만, 생각해보면 그것은 글을 쓰고 싶어서가 아니라 글을 씀으로써 가상의 누군가와 만나는 것이 좋아서였는지도 모른다. 아무도 내 말에 귀기울이지 않고, 아무도 나에게 흥미를 보이지 않으며, 아무도 내 존재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글을 쓸 때만큼은 나는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만나고, 이야기하며, 안부를 전한다. 그 '누군가'는 나에게 어떠한 것도 강요하지 않는다. 내가 하는 어떤 말도 가로막지 않는다. 그는 오로지 듣는 자이며, 오로지 말하고 있는 나를 위해 존재하는 자이다. 나는 글을 쓸 때마다 그를 만난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그'는 누구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인가?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나 자신과의 끊임없는 대화를 하기 위함인가?


누군가에게 자신의 비밀이나 혹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털어놓았을 때 우리는 시원한 기분을 느낀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말하는 동물이지만, 경청의 능력은 결여되어 있는 경우가 많고, 그래서 그것은 훈련이 필요하다. 하지만 글을 쓸 때는 말하는 동물의 의지만 있으면 된다. 경청은 누군가 자신의 글을 읽은 후에 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글을 쓸 때 누군가의 경청의 상태를 생각하면서 쓸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좋은 글인지 그렇지 않은 글인지, 무엇이 더 나은 글인지 나는 판단하지 못한다. 나는 그저 쓸 뿐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당신은 작가인가? 작가도 아닌 사람이 무슨 가당치도 않는 말을 하는 것인가?


작가란 무엇인가? 반드시 책을 출판해야만, 무슨 신문, 무슨 문예지에 등단을 해야만 작가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작가는 자기 자신과 끊임없는 대화를 시도하는 사람이다. 그 시도는 대부분 실패할 때가 많고, 그래서 더욱 쓸쓸해질 확률이 높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삶을 견디기 힘든 사람이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그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끄적인다. 그렇게 끄적이는 행위 자체가 삶을 견디기 위한 유일한 몸부림이자, 자신이 살아있다는 유일한 증거다. 골방에 앉아 글을 쓰는 모든 사람들이 다 작가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가 다 작가인 것이다.


이 맥락없는 글을 어떻게 끝내야 할까. 시간의 흐름에서 시작해서 결국 글쓰는 것에 대한 이야기로 빠졌다. 나도 내가 쓰는 글의 길을 알지 못한다. 내가 쓰는 글의 마지막을 알지 못한다. 마치 사람이 자신의 죽음을 알지 못하듯이. 처음에 생각했던 파편들이 글을 쓰면서 이렇게도 저렇게도 흘러가는 것이다. 오래도록 무언가에 대한 생각을 붙잡지 못한 나 자신을 책망하면서 글을 마쳐야겠다. 이 글이 그런 책망의 이유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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