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보이지 않는 것

시월의숲 2020. 2. 23. 15:53

컴퓨터 앞에 앉아서 과거에 블로그에 올렸던 글들을 뒤적여본다. 짧게는 몇 달 전, 길게는 몇 년 전에 내가 쓴 글들. 그 중에 신종 플루가 창궐하던 2009년의 글과 메르스가 창궐하던 2015년의 짧은 글이 눈에 띄었다. 화창한 날에 바이러스가 유행한다는 사실이 믿을 수 없다는 글이었는데, 나는 이번에도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해서 그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입춘이 지나고 봄이 오려고 하는 이 시기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우리나라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으니 어찌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물론 나는 주말이라고 어딜 나가지 않고, 평소처럼 혼자 집에 있는 것을 즐기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이러스 때문에 스스로 격리 중이거나 가급적 외출을 자제하고 있을 것이다. 그야말로 자가격리의 시절이라고 해야할까. 그것은 말하자면 자발적 고립과는 다른 것이다. 나는 자발적 고립이라는 말과 자가격리라는 말에 대해서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바이러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가격리를 해야하는 것과 고립에 대한 숭배로 인해 스스로 행하는 고립은 그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비교 자체가 불가하다는 생각을 했다. 


어쨌든 텔레비전에 연일 속보로 방송되고 있는 확진자의 수와 그들이 다녔던 동선에 대한 이야기와, 신천지 집회자들과 청도대남병원에서의 집단 발병 등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어쩐지 비현실적인 느낌이 나를 사로잡는다. 내가 사는 곳 주위에도 확진자가 발생하고 있고, 핸드폰으로는 수시로 긴급재난문자가 오고 있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비현실성은 나를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온 나라가 코로나로 들썩이고 있는 이 시국에 말이다. 동생이 어제 전화를 하여 자신이 사는 동네에도 확진자가 나왔다고 하면서 나보고도 조심하라고 말해놓고 오늘은 경주에 있다고 전화가 왔다. 집에 가만 있지 못하는 성미인걸 아는지라 조심하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이 시국에도 어떤 이들은 집에 있지 못하고, 농사꾼들은 계절에 맞춰 일을 해야 하고, 어부는 물고기를 잡아야 하며, 건설업자들은 건물을 짓고, 배달업자들은 배달을, 수송업자들은 수송을 해야만 한다. 바이러스가 유행하고 있다고 해서 모든 일들이 중단되지는 않는 것이다. 우리들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해야하고, 사람들을 만나야 하고, 어딘가를 가야하며, 밥을 먹고 계속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게 일상이 돌아간다는 사실은 내게 조금의 위안을 준다. 반복되는 일상이 지겹기도 하지만, 그런 일상이 굳건하게 버티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정말 총체적 재난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우리가 싸워야 하는 것은 어쩌면 코로나 자체 보다도 불필요하게 과장되거나 근거가 없는 유언비어들, 사람들의 불안과 공포를 이용해 퍼지고 있는 악성 루머들이 아닐까? 이런 때일수록 머리는 차가워져야 하고, 타인에게 건네는 말들은 따뜻해져야 하는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마치 좀비 바이러스라도 되는 것처럼 호들갑을 떨며 지나치게 타인을 비방하거나 적대시하는 것 자체가 더 무서운 일이다. 우리는 모두 인간이며, 길은 사방으로 연결되어 있고, 우리는 어디든지 갈 수 있으며, 바이러스는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물론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전국을 뒤흔들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코로나 바이러스만 생각하고 있는 지금의 현실에서 벗어나 하루빨리 코로나 바이러스 외의 것들을 생각할 수 있는 시기가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바이러스는 언젠가 종식될 것이나 우리들의 삶은 계속 이어져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 모든 우려에도 불구하고 봄은 오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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