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지금은 벚꽃의 계절

시월의숲 2020. 4. 4. 21:02

지금은 벚꽃의 계절이다.


벚꽃이 핀 나무 아래를 걷는 것은 비현실의 공간으로 걸어들어가는 것과 같다. 그곳에서는 시간이 잠시 멈추고 오로지 나뭇가지 사이로 비춰들어오는 햇살과 시원한 바람, 바람을 타고 우수수 떨어지는 옅은 분홍빛의 벚꽃잎들만 존재한다. 그 속에서 나는 벚나무의 비호를 받는 연약하고 죄많은 짐승이 된다. 벚꽃은 짐짓 아무렇지 않게, 아무런 미련없이, 불어오는 바람에 제 몸의 일부를 우수수 떨구고, 그 아래에서 나는 뜻밖에도 벚꽃의 세례를 받는다. 눈처럼 흩날리는 벚꽃잎들. 허무한 축복같은. 나는 구도자라도 된 것처럼 경건한 마음이 된다. 하지만 이내 정신이 아찔해지고 만다. 내 어깨에 무심하게 떨어진 벚꽃잎 하나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물끄러미 바라본다. 


결코 기다려주지 않는 것을 기다리거나, 결코 붙잡을 수 없는 것을 붙잡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또 있을까마는, 그 안타까운 마음마저 어찌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안타까운 것을 안타까워하는 수밖에.


지금은 벚꽃의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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