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당신의 첫 문장

시월의숲 2020. 4. 12. 23:40

오래 전 내가 가입했던 카페에서 이메일이 왔다. 몇 명의 사람들로 인해 간신히 유지되고 있는 카페의 존폐 여부를 묻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 메일을 읽고 오랜만에 카페에 들어가보았다. 카페는 건재한 듯 보였지만, 사람들의 활동은 눈에 띄게 줄어 있었다. 일단 나부터도 꽤 오랜 시간 활동하지 않았으니까. 내가 처음 그 카페에 가입하여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글을 썼던 기억, 타인의 글에 덧글을 남기고, 타인이 내 글에 남긴 덧글을 읽고 상처를 받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나는 한 때, 꽤나 열성적으로 그 카페에서 활동을 했던 것이다. 그 열정이 지금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그런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지금은 그 카페가 어색하기만 하고, 그 카페를 통해서 내가 무얼 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무력감이 앞선다. 그저 내 어설프고 설익은 열정의 흔적을 확인하고는 괜히 창피한 기분에 혼자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그렇게 오랜만에 들여다본 카페에서 어떤 단어들이 눈에 띄었다. 넋두리라는 메뉴 상단에 있던 '당신의 첫 문장'이라는 말. 그 문장을 보고 당신의 첫 문장이라는 말이 눈에 띈다는 혼잣말을 올렸는데, 어떤 이가 내 첫 문장이 무엇인지 궁금하다고 덧글을 달았다. 그 이후로 계속 내 머릿속에 '당신의 첫 문장'이라는 말이 맴돌았다. 내 첫 문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마치 아기가 자신이 처음 한 말을 기억하지 못하듯, 자신의 첫 문장 또한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혹은 '당신의 첫 문장'이 무엇이냐는 말은, 당신의 삶을 지금까지 살아오게 한 좌우명이 무엇인가, 무엇이 자신의 삶을 이끌어오게 한 것인가, 그런 삶을 살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 무엇인가... 이런 물음들과 같은 것이 아닐까. 혹은 첫사랑이라는 말처럼, '처음'이라는 말에서 오는 알 수 없는 기대감과 열패감, 달콤 쌉싸름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담고 있는 말은 아닐까. 그것도 아니라면, 내가 읽은 책 중에 내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준 문장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당신의 첫 문장'이라는 말은 무엇보다 문학적이고 감상적인 생각에 빠져들게 만든다. 저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줄곳 나는 저 문장에 지배당했다. 그래서 언젠가는 저 문장에 대한 글을 쓸 수 있으리라는 예감에 휩싸였다. 지금 이 글은 그런 예감의 아주 미미하고 보잘것없는 실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어떤 문장이 한 사람의 삶을 전혀 다르게 변화시킬 수 있는가. 그 변화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세하게, 아주 천천히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일단 한 번 시작된 변화는 어떤 식으로든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드는 것은 아닌가. 그 변화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그것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결코 알 수 없고, 우리가 그것을 자각할 수 있게 되었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점까지 와 있게 되어버리는 것은 아닌가. 나는 지금 '당신의 첫 문장'이라는 말이 내게 알 수 없는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는 사실만을 알 수 있을 뿐. 이 글은 결국 '당신의 첫 문장'에 대한 대답이라기 보다는, '당신의 첫 문장'을 둘러싼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가. 나는 내 첫 문장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리하여 당신, 누군가 이렇게 묻는다면 당신은 어떤 대답을 할 수 있겠는가?


'당신의 첫 문장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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